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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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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6. 27. 15:23 생활의 발견
1. 어제 모처럼 학교 왔다가 집에 가는 길에 깨끗해진 본부를 보고 굉장히 낯설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게 "보통의 모습"일텐데, 어느새 플랜카드들이 걸린 본부가 익숙해졌나보다. 그래서 근 한달만에 본부 점거가 끝난 것을 직접 눈으로 봐도 실감이 잘 안나기도 하고.
 아무튼 점거 해제 타이밍만 두고 생각한다면 사실 잘 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방학이 더 지나고 계절학기도 끝나면 처음 비상총회때나 본부스탁만큼의 관심과 열의는 사라질테니까 말이지. 열심히 활동하던 친구들의 얘기나 트위터를 보면 사실상 패배라고 우울해 하지만 그래도 상황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지켜보지 않았던 한 사람으로선 이정도면 선방한 거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렇게 됐으니 총장이 약속대로 어느정도 성실하게 대화를 할지를 계속 관심가지고 두고보는게 제일 중요할 것이다. 물론 총장도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끝나선 안될테고.... 모쪼록  총장이 사태가 의외로 진행된 점을 염두에 두고 이제 진행 방식이나 속도를 좀 바꾸기를 바라마지 않는데, 그동안 한 짓이 이명박 정부에서 욕먹는 짓이랑 판박이였던지라...과연 그럴지.

2. 아침에 밥을 먹으면서 자기네 방송사에서 여름 시즌에 새로 시작하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을 봤다. 이런 저런 소개와 함께 "....에서부터 서울대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참가자들이"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참가자 이름이 나오는데 낯익은 이름이 나왔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역시나 아는 사람이다. (그쪽이 날 아는지는 모르겠다. 반 후배이긴 하지만 나이차도 있고 이래저래 반방에서 같이 한 시기는 거의 없는걸로 알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게 더 사실에 가까울지도.)
 이 프로그램 말고도 두 개 정도의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을 더 소개해줬는데 보고 있자니 약간 화가 났다. 아무리 대세가 서바이벌이라고 하더라도 이젠 서바이벌이 아니면 프로그램 자체가 진행이 안되는 것일까 하고. 현실에서도 승자독식의 서바이벌이 판을 치고, 여기에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기고 있는데 왜 텔레비전에서도 똑같은 형식의 프로그램이 나오는 걸까. 뭐 현실과 텔레비전 속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냐...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7ㅏ수다"는 정말 마음에 안들지만.. 뭔가 사람의 어두운 마음을 잘 찌른 것 같기도 하고. "바람직한 진행혁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니 TV서 보기 힘든 실력있는 가수들 볼 수 있는거 아니냐?" 이렇게. 이 프로그램에 대한 불편한 마음에 대해선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는 방송 초반부 만을 봤기 때문에, 혹여나 그 뒤로 내 불편함을 덜어줄만큼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이 얘긴 그만 하련다.)

3. 그러나 경쟁 피로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논문만 빨리 잘(응?) 쓰면 되는, 경쟁하고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 이런거 얘기해봤자 누가 공감해줄까 싶기도 하고.... 등등의 주절거림으로 최근 하지 않은 블로깅을 대신해봅니다. 때가 되면 조금 더 정리해서 말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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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년 동안 연재되었던 니노미야 토모코의 『노다메 칸타빌레』가 최근 25권으로 막을 내렸다. 지휘자의 꿈을 키우며 노력하고 또 크게 성장할 자질이 있었지만 일본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초조해했던 치아키 신이치와, 분명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공식적인 음악 교육에는 여간 적응하지 못했던 노다 메구미(이하 노다메) 두 사람은 이제 촉망받는 세계적인 신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가 단순히 두 사람이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키우며, 그러는 동안 사랑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만 전개되었다면 이 만화는 큰 인기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독자들에게 크게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만화가 두 사람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같이 꾸려나가는 사람들 사이의 조화와 협력,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같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보통 한 분야의 천재들을 그려내는 작품들은 종종 1)소위 타고난 ‘모차르트’와 노력형인 ‘살리에르’, 혹은 2)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천재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재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따른 대립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즐겨 보았던 - 물론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 일본 만화나 드라마들이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차르트’와 ‘목표가 뚜렷하고 냉정한 살리에르’의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노다메 칸타빌레』가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난 점은 유난히 눈에 띤다. 치아키나 노다메는 슈트레제만을 비롯한 모모가오카 음대의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친구들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들 역시 미네를 비롯한, 어딘가 미숙하고 부족한 S오케스트라의 구성원과 같은, 말 그대로 평범한 ‘주변’ 인물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게끔 도와주며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S오케스트라가 R☆S오케스트라로 진화한 모습이나, 지휘자 데뷔 후 치아키가 맡았던 루 말레 오케스트라가 바닥을 친 뒤 조금씩 왕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마지막 화에서 R☆S오케스트라가 마지막 곡을 공연할 때 지휘자 치아키가 연주자와 한 명씩 눈을 맞춰가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에서 이 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천재를 다루면서 동시에 ‘보통 사람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모여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나 축구를 다룬 작품들도 『노다메 칸타빌레』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이서 함께 하는 내용이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에 비하면 어쩐지 각각의 ‘천재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팀을 이루어 경기를 하며 이기는 것에 그친다는 인상이 든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교학상장(敎學相長) 정신(?)이 유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경쟁위주 입시 교육 때문에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최하위권을 차지했다는 소식(조선일보 2011년 3월 28일)이나, 소위 ‘징벌적 등록금 제도’ 때문에 연이어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카이스트와 같은 우리의 현실과 큰 차이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만화나 드라마는 현실과 다르다. 하지만 창작을 통해 우리가 협력하여 같이 성장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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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해서 <부덴브로크가 사람들>로 시작해서 <보바리 부인>으로 가더니 <인형의 집>으로 끝나는 분위기다.

배우, 스토리, 화면 다 나쁘지는 않았는데(최근 본 영화 중에서 '싱글맨' 다음으로 시종일관 - 시쳇말로 - '우아돋는' 영화인것같음) 흠이 있다면 영화 음악. 사실 영화 음악만 놓고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진 않은데 뭔가 사람 부담스러울정도로 몰아가려는 무언가가 있음. "자식들아, 긴장타라!" 이런 느낌. 근데 막상 긴장탈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안벌어짐. 뭐랄까 약간 옛날 영화/극 처럼 구성을 한 일환에서 그런 거라면 약간 이해가 될법도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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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만추》의 주 무대인 안개 낀 시애틀은 주인공에게나 관객에게나 상당히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시애틀의 특산물인 - 『무진기행』의 무진처럼 - 안개는 모든 것을 흐리게 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주인공 두 사람의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연출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서양 도시가 만든 몽환성을 통해 두 동양인의 이질성을 더욱 돋보인다.

 그러나 시애틀이라는 환상적인 배경은 영화의 서사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만추》는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그 부족함을 관객들은 시애틀의 낯선 느낌, 혹은 두 사람의 이방인성을 통해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 설명의 부재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에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제법 현실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환적인 이야기라고 하기는 현실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하기는 상황 연결이 충분히 논리적이지 못한 탓에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채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장면의 전환들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전후의 장면들이 영화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우선 시애틀 시내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놀이공원에서 마주친 다른 두 남녀의 대화를 상황극(?)으로 이어 받으면서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상황극은 현실감 있게 시작하다가 두 남녀가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 환상적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훈과 애나 두 사람이 파한 유령시장골목을 질주하는 장면으로 갑자기 바뀐다. 이 시장에서 애나는 독백조로, 그리고 모국어로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훈의 어림짐작을 통해 대답한다. 이 장면 두 사람이 교감하는데 언어와 같은 장벽이 방해가 되지 않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은, 개별 과정들로만 보면 인상적이지만 한 데 어울려 보면 어딘가 납득하기 힘든, 파편화된 인상이다.

 어색함은 애나의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드러난다. 길에서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졌던 두 사람이었는데, 훈은 어떻게 장례식장을 알고 찾아갔을까? 물론 신문 부고를 통해, 낯선 중국계 이름을 쉽게 찾아 알았으리라는 추정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시애틀은 대도시가 아닌가. 시애틀에서 처음 다시 마주쳤던 것까지는 정말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연고 없는 두 남녀가 세 번째로 만나는 것마저 우연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친 뒤 훈과 애나, 왕징과 그의 부인의 대화는 왕징의 부인도 훈의 거짓말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을 법 함에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그 부분도 사실적이라고 납득하기 쉽지 않다. 훈과 왕징 두 사람이 실제로 싸운 이유를 감추기 위해 둘러댄 “포크 변명”은 희극적이지만 동시에 애나가 영화 내내 억누르고 있던 비극적인 감정을 유일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쓰러져 오열하는 애나를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러다 장면은 다시 한 번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두 사람이 터미널로 가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후 애나와 훈 두 사람은 다시 버스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도시를 떠난다. 이 모습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나의 위치를 물어보는 간수의 전화, 그리고 훈의 소재만을 파악하고 말없이 끊은 옥자 남편의 전화로 안개 속 휴게소에서 현실로 붙잡혀 돌아온다. 하지만 이 전화들도, 특히 훈이 받는 전화는 어딘가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한 번 더 현실로 끌어내리는 일종의 확인사살과 같은 느낌이다. 차라리 애나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훈이 옥자 남편에게 죽임을 (아니면 적어도 발길질이라도) 당했더라면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더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시애틀에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수 년 만에 돌아온 중국계 애나와, 무언가에 쫓기며 흘러들어왔던 코리안 지골로 훈은 어쩌면 유령투어를 하다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관광객들이 생각했던 대로 정말 유령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애나는 어머니가 죽은 뒤 재산 분배 과정과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은 현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훈은 애나에게 고객이 원하는 모습이 무엇이든 다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애나는 훈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러한 애나의 무(無)요구에 훈이 자연스러운 본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애나는 훈에게 자신처럼 유령이 되어달라고 요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시애틀의 유령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두 유령에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으라고 계속 강요하고 있는 느낌이다. 훈이 조금 더 유령과 비슷했다면, 혹은 영화 시간을 줄였더라면 시애틀에 만난 두 사람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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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30. 00:57 (독)문학 관련/서평들

  19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두 가지 혁명을 통해 새롭고, 종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면서 그에 맞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이전의 지배 계급이었던 귀족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여 적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제국의 시대』에서 에릭 홉스봄이 말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었고, 물질을 통해서만, 적어도 물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소비와 같은 물질적인 성취는 예술과 교양, 도덕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했다. 즉, 두 가지 요소를 같이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 있지만 동시에 물질이 정신의, 정신이 물질의 불가결한 기초였다. 이 이중성에서 부르주아의 위선이 폭로됐고, 그 위선은 성의 영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로이트는 그 위선을 무의식이나 억압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고, 그의 노력은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자신만큼 이러한 이중성을 잘 포착했다고 인정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진, 의사이자 작가였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엘제 아씨』는 동명의 소설을 비롯한 슈니츨러의 여러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1901)와 「엘제 아씨Fräulein Else」(1924) 두 작품은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섬세하게 포착하였다. 두 소설 모두 모순된 도덕적 가치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개인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두 주인공의 내적인 갈등은 다른 식으로 전개되고,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구스틀 소위』에서 구스틀은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가치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제빵업자에게 모욕을 당한다. 모욕을 당하면 결투를 해서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당대의 관습. 특히 이 모욕적인 일이 공적인 공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 장면을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결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의 사람이기 때문에 결투 자체가 불가능 했다. 그렇다면? 명예를 위해서 그는 자살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용히 일어났고 당사자인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목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자살을 해야겠다는 결심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에 주인공은 밤새 번민한다. 하지만 그가 고뇌하던 하룻밤 사이에 제빵업자는 갑자기 죽어 결투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그의 고민은 해결됐다. 적어도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명예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구스틀 소위는 자신은 명예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결투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모든 번민에서 해방된다는 점을 통해서 그가 진짜 명예가 아닌, 불명예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명예 그 자체가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사회의 이중적인 도덕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제 아씨』에서 엘제가 처한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엘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도르스데이에게 빌려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그 대가로 성관계를 은연중에 요구한다. 이 제안에 엘제는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절이라는 가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모두 부르주아(여성)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률이므로 엘제에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포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엘제가 처한 복잡한 상황은 그녀의 독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엘제는 모두가 아닌척하면서 다 성적 유희를 즐기는데 자신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고귀한 딸이 몸을 팔고 한술 더 떠서 나중엔 재미까지 보”(39쪽)는 자기는 “끼가 있는 화냥년”(68쪽)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래에 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바엔 죽어버리겠다며 말을 번복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가정을 위해서라면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러다 재차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화냥년으로 돌아와 반복된다. 이러한 급변하는 심리묘사를 통해 불안에 떨며 갈등하는 엘제의 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에는 아빠가 스스로를 - 아빠가 죽었다 그것이겠지, 그렇다면 만사 오케이지, 그러면 난 헤어 폰 도르스데이와 함께 초원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오 오, 난 야비한 여자야. 천지신명이시여, 이 전보 속에 제발 나쁜 것이 들어 있지 않도록 해주세요. 천지신명이시여, 아빠가 살아 있도록 해주세요. 저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구속될지라도, 죽는 것만은 제발, 이 안에 나쁜 것이 씌어져 있지 않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무엇이든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90쪽)

 

  고민 끝에 엘제는 도르스데이에게 복수를 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는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엘제는 자신과 도르스데이 단 두 사람만이 아니라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나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후에 엘제는 혼절하여 쓰러지는데, 만약 혼절(한 연기?)이 완벽했고, 요양내지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그녀는 구스틀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스캔들로 오명을 가질 수도 있지만, 도르스데이가 거래사실을 폭로하지 않는 이상(물론 그는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 히스테릭과 같은 병명으로 그녀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엘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대로 자살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은 그녀가 구스틀과 달리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사건을 저지른 그 순간인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엘제의 독백이 '화냥년'보다는 '부르주아 가정의 딸'로써 아버지와 가정을 지켰다는 언급이 점차 많아지면서 알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만 했던 일을 나는 실천한 거야. 아빠는 구출되었어. 난 다시는 인간 사회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 (123쪽) (……) 날 살려줘, 파울.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날 죽도록 놓아두지 마.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러나 내가 일단 잠들어버리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거야.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날 좀 제발 살려줘. 오로지 아빠 때문이야. (125쪽) (……) 아빠, 저는 당신 딸이잖아요, 아빠. (128쪽)

   

  구스틀과 엘제 두 인물을 비교해보면 엘제가 명예와 윤리적 원칙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구스틀의 상황 인식이 엘제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스틀은 부르주아출신의 초급 장교로 말단이나마 그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주류의 핵심으로 더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엘제는 이제 막 사교계에 진입하려는 미성년인 여성으로, 자신의 미래가 결혼과 같이 타인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그녀에게 가정의 안위가 걸린 일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성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부담이 더해졌다. 더군다나 엘제가 느낀 성적 충동은 19세의 그녀에게 본능에 따른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느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오늘날보다 엄격했던 당시의 윤리관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느끼는 부담이나 혼란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것은 그저 두 사람의 성과 나이, 혹은 사회적 경험이나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작가(와 그 시대가)가 가지고 있던 남녀의 위계질서가 두 인물에게 투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슈니츨러가 자신의 불평등한 시각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도 아닌 것 같다. 슈니츨러는 당대의 이중적 성도덕과 이를 대하는 남녀의 차이를 최대한 사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 이글은
문학과 지성사 독자 리뷰어로 선정되어 쓴 글입니다.

posted by Gruentaler
2011. 1. 17. 01:32 생활의 발견

  새해를 맞아 한 해의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나간 해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늘 연말연시에 막연하게나마 새해의 다짐은 해도 지나간 해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보았던 적은 것 같다.


 지난 해의 초 나는 블로그에 “올해에는 조금은 더 부지런해지고 조금은 더 부끄러워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다짐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논문만 해도 여름 방학동안 주제를 잡고 2학기에 서론을 마련해서, 이번 1학기에 발표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태만한 탓에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다. 여전히 주제를 잡는 것에 고민하고 있고, 스스로가 논문 진척 과정에 만족하지 못해 마음 편히 잠든 적이 거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지런히 살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할 이유가 있으리라.


 부끄러워할 줄 알자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hic et nunc)’에 안주하고 만족하지 말자는 경계심에서 삼은 좌우명이었다. 하지만 부지런하지 못했기에 나는 늘 부끄러워하며 잠들었으니, 한해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부하기는 부끄럽다. 부끄러워하기만 하고, 그 이상의 노력은 항상 내일로 미루다 한해를 다 보내버리고 말았으니까. 이렇게 되니 왠지 부끄러워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지난해가 마냥 실패한 해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다시 체중을 줄였고, 우연찮게 다시 해외를 다녀올 수 있었으며, 학교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총론에선 만족스러울지 못해도 각론에서는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한 해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올해는? 물론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더욱 부지런해지고 더욱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리라.


1. 진로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진지하게 열어둘 것.

2. 논문은 반드시 2학기에 마무리할 것. 공부를 계속하면 그 출발점이자 연속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논문은 그 마무리이기 때문에.

3. 쓰기보다 읽기에, 읽기보다 생각하기에.

4. 하지만 그렇다고 읽기와 쓰기를 게을리 하지 말 것.

5. 사소한 일이라도 먼 앞날을 헤아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생각해서 말하고 행할 일.

6. 따라서 말하기 전에 반드시 생각하고 말할 것.

7. 친한 사람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말 것.

8. 공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세 번째 다섯 번째는 광복 전후에 활동한 사학자 김성칠이 ‘새해의 맹세’로 1950년 1월 1일 일기에 남긴 것 중의 일부이다. 물론 취하지 않은 것도 마땅히 따라야 할 일이겠지만, 큰 맥락에서 조금은 벗어나거나 중복되는 것 같아 그대로 전부를 옮기지 않기로 하였다.


 어느덧 새해 첫 달도 절반이 지나 이제 새해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아직 마음은 그렇지 않다. 새해의 다짐도 예전 같았으면 어설프게나마 들뜬 마음에 진작 정했을 터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정한 느낌이다. 지나간 해가 썩 만족스럽지 못한 미련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일을 제 때 매듭짓지 못하고 지금을 외면한다면 똑같은 후회를 올해 말에 다시 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항상 경계하고, 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posted by Gruentaler
2011. 1. 13. 22:08 기억의 습작

 

새해의 맹세

1. 말로나 글로나 수다를 떨지 말 일.

2. 겸손하고 너그너우며 제 잘한 일을 입밖에 내거나 붓끝에 올리지 말 것.

3. 남의 잘못, 학설의 그릇됨을 타내지 말고 제 바른 행동과 제 깊은 공부로써

   이를 휩싸버릴 것.

4. 약속을 삼가하고 일단 승낙한 일은 성실히 이를 이행할 일.

5. 쓰기보다 읽기에, 읽기보다 생각하기에.

6. 사소한 일이라도 먼 앞날을 헤아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생각해서 말하고 행할 일.

7. 날마다(하루도 거르지 말고) 무엇이든 생각하고, 그 결과를 일기(日記)로 적어 둘 것.
(1950년 1월 1일)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작과 비평사.

이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구실에 있던걸 집으로 가져온 것 같은데... 찾지를 못하겠다. 나의 새해의 맹세는 조만간 올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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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의 미국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을 다룬 드라마 《더 웨스트 윙The West Wing》(1999~2006 방영)의 다섯 번째 시즌(2003~2004 방영)은 재선에 성공한 해와 그 다음해 까지를 다룬다. 전체 8년 임기 사이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이 기간은 처음 당선했을 때보다 행정부가 자신의 아젠다를 보다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초반 4년은 집권 2년차에 실시하는 중간선거와 재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집권 2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정권 재창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 이르면 임기 첫해만큼의 참신함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초선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통령이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석참모진 대다수에게조차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 행정부는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격렬한 도덕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은 이 문제를 극복하였고, 지난 4년 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하여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보다 확실하게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다섯 번째 시즌은 다른 어느 시즌들보다 백악관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즌은 오히려 백악관보다는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상대인 공화당,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주당) 행정부의 시각에서 본’ 공화당에 중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전 시즌에 걸쳐서 백악관은 의회를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하며 로비를 벌이며 정책을 견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내부의 결집을 꾀하고 표 이탈을 막으려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고, 공화당과 관련해서도 공화당 전체보다는 개개의 온건한 경향의 공화당 의원들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공화당의 지도부가 백악관의 협력대상으로 전면에 부상한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 화에서 대통령의 딸이 약에 취한 채 근본주의 이슬람 과격 단체를 자처하는 집단에 의해 납치를 당했고, 부정(父情)에 이끌려 잘못된 상황대처를 할까 우려한 대통령은 권한을 수정헌법 25조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일시 위임한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부통령은 납치 직전에 성추문이 발생하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기 때문에, 헌법상 그 다음 계승자인 공화당 소속의 하원 의장 워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의 딸의 무사를 염려하는 것과 동시에 공화당이 일시적으로 행정부를 장악한 틈을 타서 공화당이 원하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을 아닐지, 나아가 자신들의 정책들을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위기 앞에서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강경하게 사태에 대응하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아랍 국가에 있는 해당 테러 단체의 근거지를 폭격하여 테러 단체를 압박하고, 일말의 타협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편 워킨은 보좌진들의 우려와는 달리 부통령 인선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종전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았다. 잠깐이긴 해도 일시 권력을 잃어 전전긍긍했던 백악관의 참모진들은 오히려 소심하고 속 좁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화당의 처신은 대범했다.

 이후에도 공화당은 당면한 주요 현안에 대해서 국정운영의 협력자로서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는 연방 대법원과 사회 연금 개혁안이다. 연방 대법원장의 노쇠와 다른 대법관의 사망으로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자 공화당은 두 자리를 모두 보수 성향, 혹은 적어도 중도 성향의 판사를 지명하도록 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었지만, 강경 보수 성향의 판사를 대법관을 앉히는 대신에 대법원장 자리를 진보 성향의 여성 판사에게 양보함으로써, 연방 대법원 내 좌우의 균형을 맞춤과 동시에 ‘첫 여성 연방 대법원장’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사회 연금 개혁은 앞으로 닥칠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큰 파국을 초래할 것인지 양당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당의 성향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익단체들의 주장이 첨예하고 대립하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먼저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비록 백악관이 비밀리에 물꼬를 터서 이 사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문제를 다룰 의사가 있고 양보할 여지도 있음은 공화당측이 먼저 보였기에 가능했었다. 오히려 백악관이 예전부터 이러한 공화당 의원들을 ‘때리기’에 몰두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양당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물론 공화당이 항상 이처럼 대범한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공화당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워킨에 이어 하원의장이 된 해플리는 보다 보수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자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관철시켰고, 여기에 힘을 얻어 한걸음 더 나아가 감세를 적극 주장하였지만, 결국 지나치다고 생각한 대통령이 타협을 거부, 연방 정부의 폐쇄에 한 몫을 하였다. 공화당은 연방 정부 폐쇄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물었고, 실제로 얼마동안은 그 주장이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너무 욕심을 낸 나머지 동정여론과 정당성을 확보한 대통령이 주도권을 되찾음으로써 ‘독박’을 쓰기도 한다.

 이처럼 ‘쿨’하지 않은 면모를 보이기도 종종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웨스트 윙》의 다섯 번째 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리당략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민주당의 믿을 수 있는 이상적인 파트너로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양당 출신의 전직 대통령들이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에 대하여 다소 방법은 엇갈리긴 했지만 현직 대통령에게 근본적으로, 종전의 경제/전략적인 관계를 넘어설 때가 됐다고 조언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링컨이 이 에피소드에서 계속 언급된다는 점이다. 사망한 대통령이 링컨을 가장 존경했고, 고인이 대통령에게 남긴 유언에서 중동 문제에 대해 조언하면서 링컨을 언급했다는 점, 그리고 링컨 재임기의 내전이 에피소드의 부수적인 이야기로 언급된다. 내전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자유와 민주주의와 같이 전형적인 미국적 가치로 인식되는 것들이 링컨과 공화당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망한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원은 그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일하게 했었고, 그래서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더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에서, 이상적인 공화당의 모습을 재차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 행정부를 주인공으로 다루면서, 이 드라마는 반동역할을 하는 공화당을 이렇게 묘사하였을까? 이상적인 대통령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 바틀렛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트지만, 그렇다고 독선적이지도 않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구식 유머를 즐기는 인간미 넘치는 세 딸의 아버지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철인(哲人)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설정되었다.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한층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도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그 긴장감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의 절정은 이후의 두 시즌에서 등장하는 공화당 소속 대선 후보 아놀드 비닉을 통해 나타난다. 5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의 “대인”과 같은 모습은 비닉의 등장을 위한 초석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드라마 안의 가상의 정치판과 현실의 정치판의 상호 작용에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현실의 정치가 드라마만큼이나 신사적이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정치가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들이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은 거꾸로 현실 정치가들에게 하나의 룰 모델로 제시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이상적인 정치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줄 것을, 또 정치가들에게는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바틀렛 대통령의 집권 5-6년차는 이렇게 지나갔다. 이 기간은 행정부가 당차게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그 시기를 놓쳤고,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것을 겪어나가면서 바틀렛은 대통령으로서 더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성장은 절친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멘토 역할까지도 하였던 비서실장인 리오 맥게리와 점차 미묘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 성장은 ‘공화당’ 못지않게 이 시즌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임기는 2/3선을 넘어섰고, 그는 이제 연착륙을 준비해야만 하는 시점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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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22. 13:52 생활의 발견

 블로그에 한참 글을 못썼다. 트위터에서 시시덕거리느라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이래저래 오랫동안 키보드를 두들길 물리적/정신적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래저래 "안썼다"라고 말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 오른쪽 한 구석에 "작성중인 글"이라는게 몇 개 뜨는데, '오랜만에 한번 블로깅 좀 해야지'하고 마음먹고 쓰다가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글이다. 아무래도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서 완성시키지는 못할 것같다.

 뭔가 논문 주제쪽으로라도 끄적여 본다거나 읽고 있는 책들을 중심으로 블로그에 끄적여보고 싶지만, 어느쪽도 진전이 없으니 방치될 수 밖에 없는듯도 하다. 논문 쪽이야 원래 그런거지 뭘, 하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반대로 읽는 책이나 딴 생각들이 그만큼 늘어야 할텐데 말이지. 여름방학 이래로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린 책이 도대체 몇 권인지... 왠만큼 재미가 없는 책이라도 일단 붙잡으면 끝까지 보는 편인데, 요즘은 그러질 못하고 있다.

 요즘 사는게 뒤죽박죽인데, 토끼 여러마리 잡으려다 한마리도 못잡는 기분이다. 사실 그래서 만마리라도 잡으려다 그런거냐, 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고, 두-세마리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조금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쓴다면야 반드시 무리는 아닐것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이런 일 저런 일들로 발목 붙잡힌다는 느낌이다. 생활습관이 몇년째 고정되지 못한 탓도 큰 것 같은데 (아침형 인간을 지향하나 현실은 그렇지 못함. 그렇다고 올빼미형 인간도 아니고, 그저 문제에 직면하면 "일단 자고보자"라는게 몸에 베어버린 듯) 딱히 대책이 떠오르지도 않는달까.

 라는 주절거림으로, 신발끈을 다시 묶는다는 심정으로 포스팅을 함. 블로그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posted by Gruentaler
2010. 10. 22. 20:50 생활의 발견

 킨들3를 주문했는데, 한국이 아닌 캐나다의 누나 집에서 받을 수 있도록 했었다. 어차피 추석즈음해서 캐나다의 누나 집에 가기로 되어 있던것도 있었고, 마침 (당시) 주문을 하면 그때쯤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혹시나 하는 관세나 기타 배송료등을 절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킨들 케이스 뿐이었다.
 정작 나보다 아주 약간 일찍 DX를 주문했던 연구실 선배가 추석 전에 받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노랫말 따라 '도대체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을 따름이다. 아무튼 9월 24일쯤에 도착할 예정이라던 나의 킨들은(참고로 13일에 도착예정이라던 케이스는 22일에 도착했다.), 내가 큰누나네 집에 있었던 9월 28일까지도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달을 넘겨 10월 9일에야 도착하였다. 미국에서 출발한 내 킨들은 지구는 둥구니까 자꾸자꾸 걸어나간 나머지 한 세바퀴 돈 다음에 캐나다에 왔나보다. 도대체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워왔던 북미자유무역협정은 뭐란 말인가? '해외'배송료야 그렇다치고 (비싸진 않지만) 관세도 붙었다. 이렇게 FTA를 반대할 이유가 하나 또 생겼다.
 그렇다고해서 9일에 누나가 바로 보냈느냐? 아니올시다. 그 주 주말부터 거의 한주동안 추수감사절 연휴라 우체국이 안한단다. 결국 캐나다의 누나네 집을 떠난 날짜는 연휴가 끝난 14일, 보통 일반 우편이 열흘 안팎으로 걸리니 월말에나 받을 수 있겠구나 했는데, 오늘 아침에 도착했으니 생각보다 (특히 주말도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빨리 온 셈이다.

 ....그렇게 킨들이 나에게 드디어 마침내 다가왔다.


<킨들 6' 본체와 설명서>





 <엽서(찬조출연 프로이센 왕비 루이제)-내 수첩-A4용지와 함께 크기 비교>

전자잉크는 전에DX를 봐서도 알았지만, 종이에 인쇄된것 처럼 정말 선명하게 나온다. 아래 사진은 아마존에서 공짜로 다운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일부분.


생각보다 구린데?라는 생각을 하셨다면 그건 조명때문이지 결코 킨들 문제가 아니다. -_-;
하지만 문제는 PDF인데... 화면이 작다보니 확실히 PDF보기는 약간 힘들지 않을까도 싶다가..그래도 익숙해지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페이지 넘김이 E-Book에 비해서 제법 느려지는것도 약간 흠이라면 흠. 아래 pdf는 워드로 작성한 글을 pdf로 전환하여 킨들로 옮겼다. (사진에는 없지만 원래부터 pdf 파일이었던 것을 봤는데, 아래 사진들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못난 사진사의 형편없는 실력 탓일수도 있고, 애당초 pdf파일이 아닌 워드파일을 전환한 것이라 그럴수도 있지만 E-Book보단 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글자를 좀 진하게 바꿔봤다.


아까보다는 괜찮아졌지만 그래도 2% 부족한 느낌이다. 그래서 화면대비 150% 확대를 해봤다.


한결 나아졌다. 다만 확대한만큼 이리저리 페이지를 움직여가며 봐야하는데, 그럼 또 로딩시간이 약간 걸려서 귀찮아질테고, 아무래도 왠만하면 확대는 안하고 그냥 글자만 진하게 해서 볼 것 같다. PDF파일은 킨들 구입시 받은 계정으로 이메일을 보내면 알아서 킨들 화면 크기에 맞게 바꿔준다고 하고, 실제로 해봤는데 오히려 보기에는 약간 그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페이지를 무식하게 그냥 나눠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한글은 어떨까? 다소 삽질을 했지만 인터넷 이북관련 카페를 통해 한글 폰트 변경과 영한사전 설치 등등을 했고, 아래 사진은 네이버의 나눔명조체로 설정한 한영 사전이다.


 폰트를 바꾸기전 한글은 좀 못봐주겠다 싶었는데, 글씨체를 바꾸니 한결 보기 편해졌다.

 전자책보다는 pdf를 더 많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차에(내가 당장 전자책으로 보고 싶은 책들이  전자책으로'도' 나올만큼 시장성이 좋을리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산 킨들은 솔직히 말해서 100% 내 목적에 맞지는 않으리라. DX나 아이패드가 그런 점에선 더 좋을 것 같지만, 가격이 만만찮으니... 그래도 인터넷을 통해서 지레 걱정했던 것보다는 문제는 없어 보인다. 본체도 굉장히 가벼운 편이고.(그렇다고 가방의 무게가 크게 줄지는 않겠지만...) 화면도 크게 피로감을 준다거나 그런 것이 없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posted by Gruent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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