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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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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5. 06:40 (독)문학 관련/서평들

 이 책을 그 분이 잠깐 놀러오셨을 때 읽으라고 두고갔는데, 단편소설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못했던 느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데, 이래저래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던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한 번 맥락을 놓치면 다시 찾는 것이 장편소설보다 더 어려운 단편소설의 매력(?) 때문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역자가 저자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있겠지만 원문을 읽지 않았으니 공연한 남탓은 일단 패스.


 왜 이렇게 읽기 힘들었나 하는 생각을 이래저래 해보다가 일단은 '너무 보편적'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 얼마 후에 트위터에서 한 훌륭한 친구가 먼로 이야기를 하길래 내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너무 보편적인것 같다고 하니까, 그 "평범한 일을 신선하게 포착하여 사람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라고 답을 줬는데, 내가 그 경험에까지 이르지를 못했으니, 역시나 공감부족능력은 여기서 또 빛을 발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유야 어떻든 간에 좋은 의미보다는 나쁜 의미에서의 보편성에 더 손을 들었던 내 처지에서는 우리나라에도 이 수준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작가들이 많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런 점은 매년 겨울에만 노벨 문학상에 목매다는 우리나라에 뭔가 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사실 노벨 문학상이 그렇게 정말 대단한 것인가 싶기도 하고... 



posted by Gruentaler
2011. 1. 30. 00:57 (독)문학 관련/서평들

  19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두 가지 혁명을 통해 새롭고, 종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면서 그에 맞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이전의 지배 계급이었던 귀족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여 적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제국의 시대』에서 에릭 홉스봄이 말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었고, 물질을 통해서만, 적어도 물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소비와 같은 물질적인 성취는 예술과 교양, 도덕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했다. 즉, 두 가지 요소를 같이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 있지만 동시에 물질이 정신의, 정신이 물질의 불가결한 기초였다. 이 이중성에서 부르주아의 위선이 폭로됐고, 그 위선은 성의 영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로이트는 그 위선을 무의식이나 억압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고, 그의 노력은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자신만큼 이러한 이중성을 잘 포착했다고 인정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진, 의사이자 작가였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엘제 아씨』는 동명의 소설을 비롯한 슈니츨러의 여러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1901)와 「엘제 아씨Fräulein Else」(1924) 두 작품은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섬세하게 포착하였다. 두 소설 모두 모순된 도덕적 가치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개인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두 주인공의 내적인 갈등은 다른 식으로 전개되고,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구스틀 소위』에서 구스틀은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가치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제빵업자에게 모욕을 당한다. 모욕을 당하면 결투를 해서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당대의 관습. 특히 이 모욕적인 일이 공적인 공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 장면을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결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의 사람이기 때문에 결투 자체가 불가능 했다. 그렇다면? 명예를 위해서 그는 자살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용히 일어났고 당사자인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목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자살을 해야겠다는 결심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에 주인공은 밤새 번민한다. 하지만 그가 고뇌하던 하룻밤 사이에 제빵업자는 갑자기 죽어 결투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그의 고민은 해결됐다. 적어도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명예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구스틀 소위는 자신은 명예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결투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모든 번민에서 해방된다는 점을 통해서 그가 진짜 명예가 아닌, 불명예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명예 그 자체가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사회의 이중적인 도덕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제 아씨』에서 엘제가 처한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엘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도르스데이에게 빌려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그 대가로 성관계를 은연중에 요구한다. 이 제안에 엘제는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절이라는 가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모두 부르주아(여성)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률이므로 엘제에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포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엘제가 처한 복잡한 상황은 그녀의 독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엘제는 모두가 아닌척하면서 다 성적 유희를 즐기는데 자신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고귀한 딸이 몸을 팔고 한술 더 떠서 나중엔 재미까지 보”(39쪽)는 자기는 “끼가 있는 화냥년”(68쪽)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래에 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바엔 죽어버리겠다며 말을 번복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가정을 위해서라면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러다 재차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화냥년으로 돌아와 반복된다. 이러한 급변하는 심리묘사를 통해 불안에 떨며 갈등하는 엘제의 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에는 아빠가 스스로를 - 아빠가 죽었다 그것이겠지, 그렇다면 만사 오케이지, 그러면 난 헤어 폰 도르스데이와 함께 초원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오 오, 난 야비한 여자야. 천지신명이시여, 이 전보 속에 제발 나쁜 것이 들어 있지 않도록 해주세요. 천지신명이시여, 아빠가 살아 있도록 해주세요. 저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구속될지라도, 죽는 것만은 제발, 이 안에 나쁜 것이 씌어져 있지 않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무엇이든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90쪽)

 

  고민 끝에 엘제는 도르스데이에게 복수를 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는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엘제는 자신과 도르스데이 단 두 사람만이 아니라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나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후에 엘제는 혼절하여 쓰러지는데, 만약 혼절(한 연기?)이 완벽했고, 요양내지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그녀는 구스틀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스캔들로 오명을 가질 수도 있지만, 도르스데이가 거래사실을 폭로하지 않는 이상(물론 그는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 히스테릭과 같은 병명으로 그녀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엘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대로 자살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은 그녀가 구스틀과 달리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사건을 저지른 그 순간인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엘제의 독백이 '화냥년'보다는 '부르주아 가정의 딸'로써 아버지와 가정을 지켰다는 언급이 점차 많아지면서 알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만 했던 일을 나는 실천한 거야. 아빠는 구출되었어. 난 다시는 인간 사회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 (123쪽) (……) 날 살려줘, 파울.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날 죽도록 놓아두지 마.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러나 내가 일단 잠들어버리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거야.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날 좀 제발 살려줘. 오로지 아빠 때문이야. (125쪽) (……) 아빠, 저는 당신 딸이잖아요, 아빠. (128쪽)

   

  구스틀과 엘제 두 인물을 비교해보면 엘제가 명예와 윤리적 원칙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구스틀의 상황 인식이 엘제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스틀은 부르주아출신의 초급 장교로 말단이나마 그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주류의 핵심으로 더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엘제는 이제 막 사교계에 진입하려는 미성년인 여성으로, 자신의 미래가 결혼과 같이 타인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그녀에게 가정의 안위가 걸린 일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성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부담이 더해졌다. 더군다나 엘제가 느낀 성적 충동은 19세의 그녀에게 본능에 따른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느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오늘날보다 엄격했던 당시의 윤리관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느끼는 부담이나 혼란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것은 그저 두 사람의 성과 나이, 혹은 사회적 경험이나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작가(와 그 시대가)가 가지고 있던 남녀의 위계질서가 두 인물에게 투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슈니츨러가 자신의 불평등한 시각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도 아닌 것 같다. 슈니츨러는 당대의 이중적 성도덕과 이를 대하는 남녀의 차이를 최대한 사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 이글은
문학과 지성사 독자 리뷰어로 선정되어 쓴 글입니다.

posted by Gruentaler
2010. 4. 22. 21:11 (독)문학 관련
중도에서 함순의 "굶주림"을 빌려왔다. 1장의 첫페이지에 누군가가 연필로 끄적였다.

"홍O린은 지금쯤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길의 1/3쯤 와있겠다. 아직도 울고있을까."

누군가의 흔적을 보면 보통은 기분이 안좋은데(사실 가끔 재미있게 살펴보기도한다. 관음증의 한 유형일지도.) 그냥 왠지 책의 한 구절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Gruentaler
2009. 11. 8. 00:09 (독)문학 관련/서평들

 일전의『괴테의 사랑』을 마저 다 읽었다. 아래 리플로 달았지만, 있는척하려고 '암호'로 쓴 『마리엔바트의 비가』는 뒤에 번역이 실려있었다. 스포일러 같긴 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게 사랑에 번뇌하던 괴테는 결국 "사랑하지 말라"(p.317)라는 깨달음 내지 자기다짐을 한다. 인생의 전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작품활동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사랑이었을텐데, 그리고 그 상대방들이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 못했던 것(사실 '연인'들 뿐만 아니라 괴테의 주변 인물들 모두가 그랬다. 한 사람이 천재로 활동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주변 사람들을 희생, 혹은 그들에게 민폐를 끼쳐야만 하나, 싶을 정도로)들을 생각한다면 괴테의 이 말은 적잖게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발저의 글은 이유없이 여전히 읽기 힘들었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고 있던 소재로 썼으니 (혹은 어느정도 익숙해져서인지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읽은 발저 글들 중에서는 쉽게 읽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이유때문에 읽다말다 해서 얼마나 잘 읽고 덮었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Gruentaler
2009. 10. 30. 15:17 (독)문학 관련/서평들

 요즘 공부하기 싫을 때, 짬을 내서 읽고 있는 책은 발저의 『괴테의 사랑』(이룸, 2009, 박종대 역)이다. 사실 발저의 책을 몇권 읽었으나, 이유없이 유난히 진도도 안나가고 이해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상이었다. 그래도 괴테의 마지막 연애(?)이라는 사실을 재구성한 소설이니 이번에는 좀 쉽게 읽을 수 있겠지 해서 골랐는데, 그나마 좀 나은 듯 싶기도 하고. 하지만 꾸준히 읽는게 아니다보니 역시나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생각날 뿐이고 별로 읽은것 같지는 않은듯하기도...

 

그들도 괴테와 악수를 하고 포옹했다. 울리케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그녀에게 몸을 돌렸을 때 괴테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순간 그녀가 등을 돌리더니 말했다.
 "저도 듣고 싶어요. 각하께서 저를 왜 보고 싶어 하셨는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사랑이었어." 괴테가 말했다. (p.149)


 물론 발저가 재구성 한 이야기니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나이 근 70에 54살 연하의 여성에게 이러고도 좋게(?)넘어간건 역시나 괴테이기 때문이고, 또 누구 말 따라 『마리엔바트의 비가(Marienbader Elegie)』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Gruentaler
2009. 4. 20. 20:10 (독)문학 관련

»Zu vollenden ist nicht die Sache des Schülers, es ist genug, wenn er sich übt.«
"완성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일이 아니야, 배우는 사람은 연습으로 충분해."  - Goethe, Wilhelm Meisters Lehrjahre

 쓰기 시작하지도 않은 미국사 서평에 스트레스를 앓고 있으면서 위안이 되던 문구. 뭐 그렇긴 하지만 서평 과제 도서를 아직 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책이나 읽고, 오늘도 집에서 놀아버린 주제에 연습 운운하면서 위안을 삼기엔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하다.


 

posted by Gruentaler
2008. 12. 10. 13:28 (독)문학 관련/서평들

그 남자가 악어 뱃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 도스토예프스키,『악어 : 이상한 사건, 혹은 아케이드에서의 돌발적 사건』(박혜경 역, 열린책들, 2007.)

 
 어느 날 시내의 아케이드에서 전시 중이던 악어 한 마리가 이를 구경하러 온 한 사람을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먹어 버렸다 라기 보다는 그냥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악어에 잡아먹혀 완전히 소화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고무풍선과 같이 텅 빈 악어의 뱃속에서 살아남아 편안히 누워 있다. 그리고 이사람을 이야기의 화자인 세묜 세묘니치와 희생자의 부인인 엘레나 이바노브나는 어떻게 해서든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악어 주인은 악어가 구경거리로서의 상품가치가 높아진 것을 눈치 채고 날이 갈수록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들을 요구하면서 완강한 자세를 취한다. 세묜이 도움을 청하러 간 늙은 관리 역시 이 사태에 대해서 희생자인 이반 마뜨베이치를 적극적으로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가 이성이나 진보를 너무 맹신하는 자세가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다고 탓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에서 건너온 그 악어가 외자유치에 도움이 된다며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보고 있으며, 미망인(?)에 대해 음흉한 생각도 거리낌 없이 말한다. 사태가 더더욱 우습게 진행되는 것은 이 악어 뱃속에 갇힌 이반 역시 오히려 악어 뱃속이 ‘고무 냄새가 심히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공간이며, 자신이 그 곳에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경제적, 사회적인 이득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완벽한 공간’에 주인공과 자신의 부인을 초대하기까지 한다. 악어 뱃속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용모를 한 엘레나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한편 이반과의 이혼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를 바라보는 세묜은 부인의 ‘외도’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묻기보다는 오히려 질투심을 갖는 등 은연중에 관심을 표명한다. 소설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나기 때문에, 결국에 이러한 ‘경제원리’등과 같은 이성적 사고가 악어 뱃속의 한 남자를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될지, 아니면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그가 계속 악어 뱃속에 머물게 될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작가의 머릿속에, 그리고 독자의 판단에 달리게 됐다.


 악어가 사람을 집어 삼켰다는 비극적인 사건은, 결국 이렇게 희극적으로 진행된다. 무엇이 이 사건을 희화시켰는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인 논리나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하기 전에 이미 주인공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불쾌했겠지만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호기심을 유발’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희화되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 과정은 모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특히 경제적인 원리를 통해 바라보았을 때 틀린 점은 없다는 점이 이야기를 어이없게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얽힌 것처럼 보여도 이러한 논리에 따라 비정상적인 상황의 현상 유지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합쳐져 일단락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돈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돈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끝까지 웃기다. (‘열린 결말’에서 ‘끝’이라니? 이 표현마저도 우습다.)


 이제 각 등장인물들이 아닌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자. 일단 사건이 발생한 곳은 아케이드였고, 유럽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데리고 온 악어에 의해서 발생했으며, 그 악어 뱃속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다. 아케이드는 벤야민 등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인 대도시 형성 과정에 있어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공간이다. 또한 소설의 배경인 1865년 당시 독일은 아직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주요 영방국가들은 후진적인 사회를 발전시켜야 하는 러시아에 있어서는 하나의 룰 모델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 대륙의 선진적인 모습을 직접 가서 보며 배우고 싶었던 이반 마뜨베이치는 바로 그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아케이드의 한 전시실에서, 그가 그토록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선진적인 유럽 본토에서 운반된 악어의 뱃속에 갇히게 된다. 이쯤 되면 악어의 뱃속이 그를 소화시킬 내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가 삼켜진 것이 아니라 먹혔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 불만을 품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러시아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연구하고 이를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물론 위정자들에게까지 가르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갖는다. 이렇게 비록 그는 악어에게 먹힌 탓에 가고 싶었던 유럽에는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중첩되고 ‘완벽한’ 공간 속에 갇혀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그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 간의 이해관계나 이성적인 판단의 엇갈림 속에서도 그 나름의 이성적인 논리들에 따라 하나의 결론으로 서서히 합쳐져 가는 모습과 폐쇄적인 공간들에 여러 겹으로 갇혀버린 것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시간동안 러시아 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러시아적인 전통 가치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바꿔 나아갈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자의 입장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특히 이것이 경제적인 논리와 결합했을 때 어떠한 몰인간적인 처사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이를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가 후자의 의견을 전통의 기준과 관점을 갖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이 문제는 러시아만의 특수한 ‘전통’은 아니다. 이러한 고민은 서유럽식의 근대화(사실 이렇게 표현하기에도 서유럽의 각 국가들의 근대화에는 자신들의 특수성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리가 있지만)가 유일한 길도 아니고 정답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최소한 현상유지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따라가야만 하는 ‘주변부’에 위치한 사회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각에서는 보수적이고, 유태인이나 투르크와 같은 무슬림권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인종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작품이 고전으로서 큰 호소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우리도 주변부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혜경, 「역자해설 - 악어 : 급진주의에 대한 삐딱한 시선」, 『노름꾼 외』, (심성보 외 역), 열린책들, 2007, pp. 487-489를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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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제출용 서평이다. 선생님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대충 긁어와도 찔리는게 있으면 방학때 여유있게 읽어보시라'라고 말했으니 성적평가에는 말그대로 발로 써도 큰 영향은 없을 듯 하다.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제출했다'로만 평가에 반영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썼다.

posted by Gruentaler
마지막 학기에 복수전공 졸업논문 주제로 잡은 책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다.

실은 읽지도 않고 주제를 먼저 정해버린 주객전도의 케이스인데, 일단 주 관심사가 대도시이니까 그런 주제를 잡은 문학작품 중에서 뭘 할까 하다가, 독문학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대도시 소설이라길래 덥썩 물었는데, 아, 이게 그럴만한게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장편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번역판들은 70~80년대 '전집류의 시대'에 나왔던 것들이 전부라서 번역도 전반적으로 신통찮고, 그렇다고 원서로 직접 보기에는 내공이 부족할 뿐더러 베를린 방언으로 쓰여져 있다는 점,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놈의 소설은 그놈의 몽타주기법인지 뭔지 때문에 독자가 별생각없이 줄줄 읽어갔다가는 해메기 딱 좋은 소설이라는 점들이 상당한 애로사항이라는 거다. 2학기 개강 보름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나마 마지못해) 다 읽은것도 보름전 주말이었고.

그래서, 뭘 어떻게 쓰고 있느냐 하면, 일단 대도시 소설이라는 특징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역사적 배경, 서술 기법, 대도시의 일상으로 다루고 있는 주요 소재로서 성, 자본주의, 익명성의 사회 등등을 살펴보겠노라고 서론에서 호언장담을 했지만(실은 서론도 책은 안읽고 참고서적 읽은 다음에 학기 초에 일찌감치 써 둔 다음, 여태까지 거의 아무것도 안했다), 앞서 말한 애로사항때문에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일상적인 측면들에서 몇가지를 빼볼까도 생각중이지만, 그랬다가는 뭔가 중요한걸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고민이다.

이중 자본주의는 논문 담당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본 결과 자본주의가 워낙에 큰 이야기이니 상품거래로 집중해서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일단 그렇게 할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또 그놈의 몽타주 기법인지 뭔지 하면서 소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딱히 뭐를 하나 끄집어서 이게 바로 그렇다!라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하다는 사실. 그래서 독어학 수업을 들으면서 광고를 다루다가 문득 광고로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민만 하기에는 이미 학기말은 다가오고 있는데......!

거기다 장편소설이니 인용할 것은 많고, 하지만 딱히 인용한 것에 대한 설명할 것은 그렇다고 딱히 많은 것도 아니라서 인용한 것들을 좀 추려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다. 하지만 추려내기도 좀 애매한데... 되블린이란 사람은 소설을 왜 이리 이상하게 쓴 것인지 원...

졸업 논문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은 나중에, 공부가 하기 싫어져서 뭔가 딴짓을 하고 싶을 때라던가 얼추 완성된 다음에 이어서 하는 것으로..
posted by Gruent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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