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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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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16:13 서양사 관련

 논문 수정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관련한 한국어 책 두 권을 살펴보았는데,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당연할 법도 하고, 나중에 나온 책이 분명히 앞서 나온 책을 참고문헌에 기재했으니 별 문제는 없을듯도 하지만(두 책다 별도의 각주는 없음) 유사한 구절들이 보이는듯....해서 여기다 옮겨 적으니까 별로 같아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처음 읽을 때 내가 너무 예민했나?


1.

비스마르크는 처음에 젊은 빌헬름을 높게 평가했지만, 비교적 일찍 황태자의 정치적 소양이 부족함을 탄식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외무부에서 일시적으로 일하게 함으로써 국가활동을 통찰하는 능력을 심어주려고 했다. 그 당시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비스마르크의 이런 생각에 반대했으며, 빌헬름의 '미성숙'과 '불손함'에 대해 언급했다. (몸젠, 최경은 역, "비스마르크", p. 184)


 그러나 젊은 황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아버지보다 낫다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부족한 정치적 소양과 인격적 장애에 대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일찍이 비스마르크가 훗날 국가의 통치자로서의 통찰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왕자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당분간 외무부에서 경험을 쌓도록 자시를 만들고자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황태자이던 프리드리히 3세는 오히려 때가 이르고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러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혹자들은 그때부터 벌써 아들 빌헬름의 미성숙하고 불손한 기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강미현, "비스마르크 평전: 비스마르크, 또다시 살아나다", p. 622)


2.

 이 회고록("상념과 회고") 집필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옛 부하 로타르 부허였다. 그는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구술하도록 유도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를 대충 서술하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구술은 그를 피곤하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야기를 상당히 건너뛰거나 혹은 순서를 바꾸어 구술하기도 했으며, 남의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회고록은 1892년에 완결되었으며, 호르스트 콜이 비스마르크 사후에 이것을 출판하였다. 2권으로 되어 있는 1편은 비스마르크 사후에 즉시 출판되었다. 그의 해임을 다룬 3편은 비스마르크의 희망에 따라 빌헬름 2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철저한 군주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를 비판하면서도 때때로 군주인 빌헬름 황제가 대중들로부터 탄핵받는 것을 근심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3-205)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심심찮게 어려움을 겪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적인 서술에 있어 상세한 면이 부족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건너뛰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설명하는 중에 서로 연관이 없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부허의 남다른 노력이 절실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당대인들을 가급적 관대하게 다루고, 심지어 문제점은 빼기를 바라는가 하면 유산을 비롯한 자신의 문제는 애써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역사를 도구화하는 부분이나 독일 문제와 관련해서 노재상의 고집을 조율하느라 부허는 힘겨워했다. (강미현, 669)


3.

 노년기에 행했던 수많은 발언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항상 겸손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1893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허영심은 인간의 능력을 근거로 하는 담보물이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내적 자산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보려면 우선 허영심을 없애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허영심이 전혀 없었다. 그는 노년기에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대학생 때의 부족한 학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할 경우, 그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에도 불구하고 '군주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 단순하고 온화하게 발언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8)


 그러나 전반적으로 삶에 대한 그의 자세는 신에 의지하며 인간의 참된 내면을 강조하는 쪽이었다. 1893년 "자만으로 지탱되는 능력따위는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비스마르크는 만남에 있어서 항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재임 기간에는 비록 독재적인 지도자였지만 그야말로 자만심이나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심지어 게을렀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열광하는 대중 앞에서 보이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태도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강미현,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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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22. 21:32 서양사 관련

 독일사의 기말과제는 골드하겐의 책에 대한 서평이었다. 어제까지였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결국은 오늘 새벽 세시에야 완성을 했고, 어차피 늦은거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더 보고 내자 했던 것이 아침에 한 번 더 보고, 오후에 대학원 친구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해서 다시 검토받고, 오후 네시에야 제출했다............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선생님 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해서 가지 않았다는 것을 한시간 뒤에 알고 그래서 결국은 다섯 시쯤에 제출을 했다. 물론 선생님이 언제 열어 보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쓰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뻔하디 뻔한 '그럴 시간이 없'었던 이유도 있고, 사실 이 책은 논점도 그다지 마음에 안들고 계속 같은 주장만 반복하는게 짜증나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안읽었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다만 쓰다보니 독문과 수업 준비하면서 읽은 내용들이 생각나 왠지 모처럼 득템한 것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여기저기 끼워 넣었는데, 제대로 했는지나 모르겠다. 거기다 서론과 결론은 각각 첼란(그는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한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 죽음의 푸가)과 아도르노의 말(구조(救助)하는 것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지옥이 된다. 이 지옥을 이후의 시민들이 스스로 열었다. - 카프카 단상)을 인용을 했는데, 우리의 선하신 신선생님이야 그냥 웃으면서 넘겨줄 것 같지만, 지난 해에 들었던 모 선생님들 같았으면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고 한마디 써서 돌려주셨을 것 같다는 지레짐작도 해보고..

 하지만 끝내 정하지 못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뭔가 책이나 영화 제목이나 기타 각종 유명한 어구들을 조합하면 그럴 듯한게 나오지 않을까 하다가 문득 다시 아도르노가 생각이 났고, 또 벤야민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방통행하는 부정의 변증법" 아... 내가 생각해도 진짜 "허세 돋는다." 

 ...그래도 한 과목 끝냈다. 오늘 중으로 부디 다른 한 과목도 끝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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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2. 23:23 서양사 관련

 나, 하인리히, 국왕은, 우리의 군주인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정하고자 하는 규정들 안에서 독일 왕국의 대주교들과 주교들, 공작들과 백작들 그리고 다른 영주들이 나를 고소하였던 불평과 불화에 대하여 교황의 결정에 따라 사죄를 할 것이며, 그리고 그의 충고에 따라서 - 몇 가지 명백한 장애들이 그나 내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이상 - 조정안을 만들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완성되면 나는 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즉, 만약 앞서 말한 군주인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그가 안전해질 수 있는 산맥들이나 다른 곳을 넘어 가기를 원하게 된다면 나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된 한에서, 그는 - 그 자신이나 그와 함께 있거나 그에 의해 보내지거나 어떤 곳으로부터라도 그에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 - 앞으로의 생명이나 신체의 부상으로부터 그리고 구속으로부터 올 때, 머무를 때, 혹은 갈 때 그는 안전할 것이다. 나의 허가 없이 그는 자신의 명예에 대치되는 어떤 방해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러한 방해를 하게 될 때, 나는 나의 모든 힘으로 교황의 조력자가 될 것이다.



Gregory, "34 Henry's oath at Canossa  (Jaunary 1077)", trans. E. Emerton, Correspondence, pp. 112-13,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Toronto, 1988, pp.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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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2. 22:51 서양사 관련

 정의의 사랑을 위하여 여러분들은 우리와 함께 같은 대의를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봉사의 전쟁 안에서 같은 위험을 감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탈리아 입성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의 과정에 대한 이 확실한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보내어 특별한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보낸 사절들과 함께 만들어진 타협안에 따라 여러분들의 지도자들 중 몇 명이 우리를 관문에서 만나게 되는 날의 약 20일 전에 우리는 롬바르디아로 와서 그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불안한 시기들 때문에 - 실로 우리가 꽤 믿고 있는 대로 - 우리에게 보낼 수 있는 수행원이 없으며 여러분들에게 다가갈 다른 방법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국왕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확실한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사면과 사도의 축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과 성 베드로께 사죄를 드릴 것이고 삶의 그의 방식을 개선할 것과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을 계속하기를 제안하는 말을 전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답을 늦췄고 사절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그 스스로의 협약에 대한 도리에 어긋난 행동에 때문에 그를 여러모로 몹시 비난하며 오랜 협의를 하였고, 적개심이나 반항의 어떠한 기색 없이, 그는 우리가 머물고 있었던 카노사의 요새로 몇몇의 수행원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곳에서, 3일 동안, 성문 앞에 서있으면서, 곁에 모든 국왕의 기장을 두고, 맨발과 조악한 차림새로, 그는 사도의 도움과 위로를 참석해있던 모든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동기를 청원자들과 눈물들로 탄원하는 동정과 연민으로 마음을 움직일 때까지 많은 눈물로 간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이례적인 엄격함에 놀랐고,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교황의 권위의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개한 폭군의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끊임없는 회개의 모습과 모든 사람들의 재촉에 굴복하여, 우리는 그로부터 아래에 명시한 보증들을 받아들여 그를 파문의 속박에서 그를 풀어주었고 그를 성모 교회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 그리고 이 사안들은 매듭지어진 지금, 우리는 여러분들의 지역에 기회가 있는 대로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보다 완전히 교회의 평화와 세계의 선한 관례에 관계되는 모든 사안들을 확립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문서화된 보증들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협의들은 미결되었고, 우리의 앞으로의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의가 없는 동의는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여러분들이 정의를 사랑하듯이, 선한 믿음 속에서 여러분들이 갖게 된 의무들을 다하고자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 우리의 관례가 그렇듯이 - 정의를 통해서이든 자비를 통해서이든, 그리고 그나 우리 자신의 영혼에 위험이 처하는 것 없이 그가 자신의 안전과 명예를 위해 우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술을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서도 국왕에게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Gregory, "33. Letter of Gregory to the German princes giving an account of the incident at Canossa (Jaunary 1077)", trans. E. Emerton, Correspondence, pp. 111-12,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Toronto, 1988, p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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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10. 00:34 서양사 관련

방치하는 것보다는 별볼일 없는 포스팅이라도 하는게 낫다 싶어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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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으로 된 것은 청강하는 학부수업. 서양의 고대문명은 순전히 취미로 듣는 수업이고, (첫수업의 인상 역시 왠지 취미로 하는 선생님의 두서없는 옛날이야기가 될것 같은 느낌.....)

 어학은, 참담하지만 프랑스어는 세번째, 희랍어는 두번째 도전이다. 외국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복습이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계속 똑같은 것을 들으려고 하니 왠지 또 아는 얘기를 듣느라 괜히 시간죽이는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나마 수업 들어가서 다시 해보는거지, 수업도 안들어가면 그러지 못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단 듣고 있다. 하지만 역시 대학원 수업에 본격적으로 치이기 시작하면 과감히 포기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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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gislav von Selchow(1877~1943), Der deutsche Mensch : Zweijahrtausende Detuscher Geschichte, Leipzig, 1933: Verlag von K. F. Koehler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H500 94]

 


 Selchow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전후 마부르크에서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였다. 이 기간동안 Selchow는 민병대 등을 조직하여 극우반동, (중도 연정에 대한) 반정부 시위 및 반유대주의 사위 및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으나 히틀러를 지지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럽사를 선사시대(Vorzeit), “모두”의 시대(400~1500), “나”의 시대(1500~1933), “우리”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선사시대는 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게르만 신들, 북독일 지역에 정착한 민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민족의 대이동 이후 나타난 ‘“모두”의 시대’는 이전의 모든 것, 다시 말해 기존의 그리스, 로마, 믿음, 문화, 기독교를 종결시키고 지중해 세계를 게르만 문화로 통합한 시기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후의 ‘“나”의 시대’는 칸트, 루터, 루이 14세, 피터 대제와 같은 시대정신을 아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하여 이들이 역사를 이끌어 나갔다고 주장한다. 이후의 현대인 “우리”의 시대는 이러한 개개인들이 모여 우리가 되는 새로운 세계와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주장한다.

 이 책은 전후 소비에트 점령지역(구 동독)에서 특별 분류 서적으로 구분되었고, 현재까지도 저자는 극우인사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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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Alexander von Müller(1882~1964), Deutsche Geschichte und Deutscher Charakter, Stuuttgart & Berlin, 1925: Deutsche Verlags-Anstalt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청구번호 H500 98]

 칼 알렉산더 폰 뮐러는 법학과 역사학을 뮌헨과 옥스퍼드에서 전공하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남독일 월간신문」(Süddeutschen Monatshefte)의 편집장을 맡았고, 1928년에 뮌헨대학교 바이에른 지역사학과 교수, 35년 사학과 교수직을 맡았다.

 성향 상 민족, 보수주의적이었고 33년 5월에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 가입하였다. 이후 나치 체제 기간동안 주요 학술 기구에서 활동(33~34 나치의 미움을 받았던 마이네케를 뒤이어Historischen Zeitschrift  「역사학보」의 편집자가 됨), 패전 후 나치 정권에 대한 협력으로 인해 모든 학술기관에서 추방되었다.

 1925년에 발행된 『독일 역사와 독일성』(Deutsche Geschichte und Deutscher Charakter)의 서문에서 저자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독일은 파국을 맞이하였고 이는 독일인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1912년에서 24년까지 「남독일 월간신문」(Süddeutschen Monatshefte)와 「독일의 꿈」(Die deutschen Träumer, Cossman 공저)에 실린 자신의 글들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책의 제목이기도 도 한 「독일사와 독일성」을 비롯하여, 19세기에 활동하였던 정치가들과 사회상에 관한 글 12편 및 1914년과 24년에 쓰인 비스마르크의 연설문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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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오랜 기간동안 서양사학과 조교를 하다 중도 고문헌실로 자리를 옮긴 S형의 낚시질에 모른 척 낚여, 독일어 공부를 할 겸하여 고문헌실에 있는 독일어 책들의 해제를 돕기로 하였다. 해제라고 해봤자, 위키에 나온 저자소개나 책의 서문과 차례 등을 읽고 책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적는 수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독일에 갔다온 밑천 다 떨어지기 전에 뭔가를 좀 해야하지 않을까 해서 하기로 했다.

 다만, 오늘 별 생각없이 했던 두 권은 나치시대 때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지식인들이 쓴 책이라 학술용으로든 45년 이전에 출판된 고서적이라는데서 오는 보관가치도 그렇게 클 것 같지 않은 책일 뿐더러 , 인쇄된 글자들도 옛날옛적 인쇄체라 글자들끼리 헷갈리는 것도 많아서 이래저래 참 의욕을 떨어뜨렸다.

 이 카테고리에 올리는 글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많이 올릴지는 모르겠지만 해제작업을 하면서 썼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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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4. 19:20 서양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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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인 합격 소식에 누군가는 축하해줄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아무튼 일단 붙었으니 자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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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16. 00:01 서양사 관련
1. 전공 필답고사

 전공 필답고사는 고중세, 근대, 현대 세부분으로 나눠지고 각각 두문제씩 제시된다, 그리고 각 분야에서 한문제씩 2시간 안에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

  (1) 고중세사
     - 스파르타의 사회를 아테네와 비교하여 서술
     - 중세의 도시 사회와 농촌 사회를 비교
    솔직히 정석을 풀면 집합 명제는 천재가 되고 삼각함수는 쥐약이 되듯이 대학원 준비하면서 나는 고대사만 공부한 관계로, 출제자의 의도와는 반대로 고대사를 풀고 나왔다. 하지만 기출문제에 여태 스파르타가 안나왔길래, '스파르타가 나올 타이밍이 됐군'하면서도 '근데 설마 이번에 스파르타를 내겠어?'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이 그 스파르타가 나오실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테네와 비교'하라고 해서 '아테네'를 쓰고 비교하였음

  (2) 근대사
     - 프랑스 혁명 당시 비기독교 운동에 대해 서술
     - 서유럽의 근대 초 군사적 변화(소위 군사혁명)과 그 의의에 대해서술
    지난학기 대학원 입시에서 개론서에 안나오는 '콜럼버스 교환체제'가 나왔다는 낭보(?)에 이번에도 J모 선생님이 외도를 할 것이라 파악, 대항해시대를 붙잡고 읽었으나, 이 책의 두께도 만만찮으니 어디를 읽어야 하나...고민하다가 그냥 통밥을 굴려서 군사적인 측면(J모 선생님이 이 주제로 대학원에서 수업중이라는 정보를 사전에 확인했음)만 읽었다. 그리고 나왔다. (...) J선생님의 귀차니즘적 사고체계와 나의 귀차니즘적 통밥이 우연히 일치한 사례. 물론, 문제를 예측한 것과 답을 제대로 쓰고 나온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
    돌아오는길에 같이 응시했던 타대생 지원자의 질문 : '근데 도대체 군사혁명이 뭐예요? 무슨 책에서 나온 내용인가요?' ... 한마디로 뭔가 덕후스러운 문제였다는 사실.

   (3) 현대사
    -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처리의 관점에서 비교 서술
    - 1929년 경제 대공황의 원인을 한 국가의 예를 들어서 설명
    근대사와 비교하자면 참 정직하고 착실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글의 모티브를 제공한 그 모씨의 말을 빌리자면, "내 갈 길만 계속 가리라"형의 문제가 되겠다.)둘다 출제자님이 쓰신 모 글에 나오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제자님이 두번째 문제를 미국의 사례로 들어 답을 쓰길 바란다는 강력한 포스를 시험장에서도 느꼈으나, 나름 그 문제의 글을 서너차례 읽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정리가 안되어 결국은 첫번째 문제를 풀고 왔다.
    (사족 - 우연이겠지만 대학원 박사과정 안모선배는, '경제가 어려우니까 29년 대공황이 나오지 않겠어?'라고 예측했었다.)

  *  결론 : 손아파 죽는줄 알았음. 그리고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뭔가 실소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겪고 나왔다는 느낌정도?

 2. 제 2 외국어 시험
  전공시험이 끝난후 한시간 반가량 식사겸 휴식시간 이후에 바로 제 2외국어 시험을 한시간 동안봤다. 간단한 지문 세개를 해석하는 시험인데. 기출문제와 비교해봤을때 '이건 뭐지?'할정도로 상당히 쉽게 출제가 되었다는 것. 다만 3번 같은경우는 어휘 선택에 있어서 좀 헷갈릴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문장 자체가 말을 꼬아버려서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풀만 했음.

 이렇게 대학원 시험을 마치고 나왔다. 준비하는 동안 역시 인생은 쉬운게 없어, 대입도 이것보다 어렵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렇지, 하는 등등의 불평불만 투덜거림을 공부는 안하고 했었는데, 결과야 어찌됐든 아무튼 뭔가 하나를 마쳤다는게 역시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다만 좀 아쉽다거나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같이 대학원 진학을 고려했던 친한 사람들이 돌연 포기했다는 것.

posted by Gruent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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