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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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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0 00:57 (독)문학 관련/서평들

  19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두 가지 혁명을 통해 새롭고, 종전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면서 그에 맞는 역할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이전의 지배 계급이었던 귀족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여 적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제국의 시대』에서 에릭 홉스봄이 말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었고, 물질을 통해서만, 적어도 물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소비와 같은 물질적인 성취는 예술과 교양, 도덕과 같은 정신적인 것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했다. 즉, 두 가지 요소를 같이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 있지만 동시에 물질이 정신의, 정신이 물질의 불가결한 기초였다. 이 이중성에서 부르주아의 위선이 폭로됐고, 그 위선은 성의 영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프로이트는 그 위선을 무의식이나 억압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고, 그의 노력은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자신만큼 이러한 이중성을 잘 포착했다고 인정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진, 의사이자 작가였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엘제 아씨』는 동명의 소설을 비롯한 슈니츨러의 여러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1901)와 「엘제 아씨Fräulein Else」(1924) 두 작품은 이러한 부르주아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섬세하게 포착하였다. 두 소설 모두 모순된 도덕적 가치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개인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두 주인공의 내적인 갈등은 다른 식으로 전개되고,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구스틀 소위』에서 구스틀은 명예와 수치심이라는 두 가지 가치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음악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제빵업자에게 모욕을 당한다. 모욕을 당하면 결투를 해서 명예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당대의 관습. 특히 이 모욕적인 일이 공적인 공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 장면을 자신을 아는 누군가가 봤을지도 모르고, 따라서 결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의 사람이기 때문에 결투 자체가 불가능 했다. 그렇다면? 명예를 위해서 그는 자살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용히 일어났고 당사자인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목격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자살을 해야겠다는 결심만큼 살고 싶다는 욕망에 주인공은 밤새 번민한다. 하지만 그가 고뇌하던 하룻밤 사이에 제빵업자는 갑자기 죽어 결투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그의 고민은 해결됐다. 적어도 그 장면을 목격한 다른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명예가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구스틀 소위는 자신은 명예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지만 결투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모든 번민에서 해방된다는 점을 통해서 그가 진짜 명예가 아닌, 불명예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는 명예 그 자체가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사회의 이중적인 도덕이 돌아가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엘제 아씨』에서 엘제가 처한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엘제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도르스데이에게 빌려줄 것을 부탁한다. 그는 그 대가로 성관계를 은연중에 요구한다. 이 제안에 엘제는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다. 그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절이라는 가치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모두 부르주아(여성)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덕률이므로 엘제에게 둘 중 어느 것이라도 포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엘제가 처한 복잡한 상황은 그녀의 독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엘제는 모두가 아닌척하면서 다 성적 유희를 즐기는데 자신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고귀한 딸이 몸을 팔고 한술 더 떠서 나중엔 재미까지 보”(39쪽)는 자기는 “끼가 있는 화냥년”(68쪽)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래에 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바엔 죽어버리겠다며 말을 번복하다가 다시 아버지와 가정을 위해서라면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러다 재차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화냥년으로 돌아와 반복된다. 이러한 급변하는 심리묘사를 통해 불안에 떨며 갈등하는 엘제의 내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에는 아빠가 스스로를 - 아빠가 죽었다 그것이겠지, 그렇다면 만사 오케이지, 그러면 난 헤어 폰 도르스데이와 함께 초원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오 오, 난 야비한 여자야. 천지신명이시여, 이 전보 속에 제발 나쁜 것이 들어 있지 않도록 해주세요. 천지신명이시여, 아빠가 살아 있도록 해주세요. 저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구속될지라도, 죽는 것만은 제발, 이 안에 나쁜 것이 씌어져 있지 않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무엇이든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90쪽)

 

  고민 끝에 엘제는 도르스데이에게 복수를 하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는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엘제는 자신과 도르스데이 단 두 사람만이 아니라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나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후에 엘제는 혼절하여 쓰러지는데, 만약 혼절(한 연기?)이 완벽했고, 요양내지 정신치료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그녀는 구스틀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스캔들로 오명을 가질 수도 있지만, 도르스데이가 거래사실을 폭로하지 않는 이상(물론 그는 폭로하지 않을 것이다), 히스테릭과 같은 병명으로 그녀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엘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대로 자살을 실행에 옮겼다. 이것은 그녀가 구스틀과 달리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비밀이 폭로되는 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사건을 저지른 그 순간인 것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엘제의 독백이 '화냥년'보다는 '부르주아 가정의 딸'로써 아버지와 가정을 지켰다는 언급이 점차 많아지면서 알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만 했던 일을 나는 실천한 거야. 아빠는 구출되었어. 난 다시는 인간 사회에 나설 수 없게 되었어. (123쪽) (……) 날 살려줘, 파울. 내가 이렇게 애원할게. 날 죽도록 놓아두지 마. 아직 시간이 있잖아. 그러나 내가 일단 잠들어버리면,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거야.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날 좀 제발 살려줘. 오로지 아빠 때문이야. (125쪽) (……) 아빠, 저는 당신 딸이잖아요, 아빠. (128쪽)

   

  구스틀과 엘제 두 인물을 비교해보면 엘제가 명예와 윤리적 원칙을 자신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구스틀의 상황 인식이 엘제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구스틀은 부르주아출신의 초급 장교로 말단이나마 그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었고, 주류의 핵심으로 더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반면에 엘제는 이제 막 사교계에 진입하려는 미성년인 여성으로, 자신의 미래가 결혼과 같이 타인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한 그녀에게 가정의 안위가 걸린 일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성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부담이 더해졌다. 더군다나 엘제가 느낀 성적 충동은 19세의 그녀에게 본능에 따른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느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사실과, 오늘날보다 엄격했던 당시의 윤리관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느끼는 부담이나 혼란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그렇다면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결말을 맞이한 것은 그저 두 사람의 성과 나이, 혹은 사회적 경험이나 지위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작가(와 그 시대가)가 가지고 있던 남녀의 위계질서가 두 인물에게 투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해서 슈니츨러가 자신의 불평등한 시각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도 아닌 것 같다. 슈니츨러는 당대의 이중적 성도덕과 이를 대하는 남녀의 차이를 최대한 사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 이글은
문학과 지성사 독자 리뷰어로 선정되어 쓴 글입니다.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