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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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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3. 11:26 wishlist

 나도 좀 아차싶은게 연말에 목돈 좀 들어왔다고 물욕이 그에 비례하여 급증했다는 것이다. 라기 보다는 평소 "우왕ㅋ 이거 좀 사고 싶다. 그런데 난 돈이 없잖아? 안될거야 아마..." 였다가 "초큼 무리하면 살 수도 있을것 같은데?"로 바뀐 것일뿐이겠지...


 각설하고, 일단 목록을 만들고 정리하다보면 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 물욕도 사라지지기는 커녕 아마 리스트가 더 늘어나겠지. (혹시 누가 알까. 울지않고 착한일 하면 연말에 산타클로스 할배가 이 리스트 보고 선물을 줄지)


 - Lego: 레고는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고, 또 재미가 있지만 그 재미에 하앍하앍하다 보면 순식간에 만들어버려서 뭔가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거기다 만만찮은 가격을 생각하면 가성비는 떨어지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레고는 재미가 있고, 재미가 있으며, 또 재미가 있으니...어?


 아키텍쳐 시리즈

 1. 빌라 사보이 

 2. 판즈워스 주택

 3. 백악관

 4. 숭례문

 

 소피스 카멜

 우주왕복선 어드벤쳐


가방

 

  내가 옷 욕심은 별로 없는대신(사실 현실적인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만큼 가방 욕심이 많지 않나싶긴 한데, 사실 어떤 가방을 사도 뭔가 10%정도는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아주 천천히 변하는 취향 문제도 없지는 않긴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방의 조건은 크고 가볍고 튼튼하고 안에 쓸데없이 칸막이 같은 구분이 너무 많으면 안된다, 인데 요즘은 노트북이나 태블릿 등을 워낙 많이들 들고다니니 마지막 조건에서 늘 걸리는 듯하다.


 만은, 이런거 상관 업ㅂ이 요즘은 

 - 메니퀸 세파네 서류가방 을 심각하게 고려중. 이건 노트북 할부 끝나면 할부로 살만하다는 생각도 들... 


 비행기 모형

 1/48 Stearman PT-27 "KAYDET" FK107  그렇다. 난 은근 복엽기 덕후였을지도..... 복엽기 로망을 제일 싸게 이룰 수 있는 법은 그냥 프라모델 하나 사서 만들면 되긴 하는데(실제로 레고에서 만든 소피스 카멜 프라모델이 만원대에 판매중임) 문제는 이 프라모델이라는게 만들고 색칠을 해야 좀 완성한 티가 나지, 그냥 뚝딱 만들기만 하면 그게 뭔가 싶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나는 색채감각이 현격하게 떨어지며, 어쩌다 한두번 만들자고 그 색칠하는 도구들 사면 결국 또 돈이 들고, 그래서 난 안될거야 아마..


 1/72 아폴로 달착륙선


 알만한 사람들은 "왜 책은 없음?"이라고 물어볼듯도 하지만, 그건 인터넷 서점 위시리스트에 진작에 넣어두었기에....

posted by Gruentaler
2012. 12. 29. 22:52 기억의 습작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가였던 윤공흠(1904~?)에 대해 다음 백과사전위키피디아 한국어 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8·15해방이 되자 귀국했으며,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2년 11월 내각 재정상, 1954년 3월 상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조선노동당 8월 전원회의 당시 '8월 종파'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회의직후 서휘·이필규 등과 함께 당중앙위원직과 당적이 박탈되었으나 소련 등 외세의 간섭으로 곧이어 열린 9월 전원회의에서 당적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공흠(1904~?)은 일제 강점기 때 화북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이자 북조선의 정치인이다.[1] 1956년 8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당시 8월 종파사건을 일으킨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김두봉최창익무정 등에 의해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의 일원으로 활동했다.[1]

1945년 8·15해방이 되자 귀국했으며,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이 성립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52년 11월 내각 재정상에 임명되고.[1]1954년 3월 내각 상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1]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다.[1] 회의직후 그는 서휘이필규 등과 함께 조선노동당 당중앙위원직과 당적이 박탈되었으나, 소련 등 외부의 간섭으로 곧이어 열린 동년 9월의 북조선 전원회의에서 당적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1]


윤공흠과 관련하여 최근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동독-북한 외교문서 관련 사료 정리 및 해제 작업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했는데, 1962년 주 북한 동독 대사인 슈나이데빈트는 주 북한 체코 대사인 코후섹(Kohousek)으로부터 "1956년 당에서 축출된 후 중국으로 이주한 전 조선노동장 중앙위원회 위원이 중국 정부에 의해 북한 첩보기관으로 넘겨졌다"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동독 외무성에 보고를 하였다. (베를린 연방문서고 소재 Bestand DY 30, Band 3646) 누구라고 정확하게 써있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윤공흠을 말하는듯....하다는 사실을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것은 아닐까...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랑삼아 올려봅니다. (위키백과에 언급된 이와 관련한 내용은 본인이 추가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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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5.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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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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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6. 12:45 생활의 발견


 종심끝나고 심사위원장님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라기보단 늘 그렇듯이 일방적으로 들었지만) 아무튼 이 분이 뭔가 자상하면서 동시에 생산적인 덕담(?)을 하신건 학교다니면서 처음 본듯도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심사위원 세 명 모두 같은 얘기를 하면서 한사람만 왜 그리 성질에 짜증을 내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물론 자기 자식하고 옆집 자식 대하는게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받은 짜증들은 (특히 발표 직전부터해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나싶기도.

아무튼 이번학기동안 집중적으로 (물론 그렇다고 그 전에는 안그랬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논문 관련해서 보다 더 자주 만나다보니 그랬던 것이지...) 그 분의 짜증을 들으면서 느낀게, 그 분이 실제보다 더 안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엄격한 학업지도"와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 버럭 내는 짜증"을 구분 못해서라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 분의 나에 대한 짜증도 결국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들고오는 결과물"에 대한 짜증일테고, 어찌보면 부당하지만은 않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은 짜증 들어주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성격의 짜증이든 어떤 성격의 짜증이든 듣기 정말 짜증난다는건 마찬가지.

짜증난다는 말만큼이나 듣는 사람 짜증나게 하는 말이 없다는 말에 공감하는 편이라 웬만하면 짜증나도 이 말을 안쓰려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많이 썼으니 널리 양해를.....


그래도 무사히 종심은 마쳤고, 더 고치긴 고쳐야할텐데...하아.

posted by Gruentaler
2012. 6. 26. 20:47 기억의 습작

방언

 1. 어떤 비극적인 대사 중간에 일종의 지방색을 띤 말투가 끼어든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라도 추하게 일그러지고 경청하던 관객들은 모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수업 중인 배우 지망생이 제일 먼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말투에서 방언의 모든 결점들을 없애고 완벽하고 순수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는 그 어떤 지방색도 쓸모가 없다! 무대 위에서는 오직 고상한 취향, 예술 그리고 학문을 통해 훈련되고 세련된 순수한 독일어만이 영광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방언을 쓰는 습관과 싸워야 하는 사람은 독일어의 일반적 규칙을 준수하고, 새로 연습해야 하는 발음을 아주 명확하게, 심지어는 실제로 그래야 하는 것보다도 더 명확하게 발음하려고 애쓰는 것이 좋다. 이 경우에는 과장된 발음을 하라고까지 권하고 싶은데, 그렇게 한다고 손해를 볼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항상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고 과장된 것을 스스로 조화롭게 고치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발음

 4. 그러나 발음이 '완벽하다'는 것은 한 단어에서 어떤 자모도 억압받지 않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모들이 그 진정한 음가에 따라 발음될 때를 말한다.


 5. 발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모든 단어들이 그 의미가 쉽고도 틀림없이 청중에게 전달되도록 발음될 때를 말한다.

 완벽함과 순수함 -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을 때에야 발음은 완전무결해지는 것이다.


 괴테, '배우 수칙(발췌)', "문학론", pp. 60-62.

posted by Gruentaler
2012. 6. 14. 15:56 기억의 습작

프레임의 법칙: 경남 함양 정여창 고택

 한옥의 창문은 액자나 다름없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방에다 그림 같은 것을 잘 걸어두지 않았나 보다. 문을 열면 소나무가 보이고, 자연이 집안으로 달려든다. 거리가 소멸한다. 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볼 때도 매한가지다. 문을 통해서 드러난 방안의 풍경은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특별하게 강조된 정경으로 다가온다. 한옥에서 문은 모두 영화와 같다. 58

 

나무의 의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타푸놈 사원을 감싸 안은 거대한 나무를 한참 보고 있으면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동물 같다. 시간을 먹고 사는 동물인 나무는 서서히 석조 건물을 해체한다. 본래의 땅에 숨어 있는 흙을 되찾으려 한다. 시간으로 건물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나무의 의지다. 나무의 의지는 신을 섬기려는 인간의 욕망을 무화시킨다. 70

 

악의 신, 선의 신

 (...) 그러나 인간은 지구 상에서 악의 상징을 만든 유일한 생명체다. 106

 

죽음과 건축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건축은 새롭게 짓는 일이다. 옛사람들에게 죽음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살았고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서도 살아갈 집을 짓는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 즉 망자의 '집'을 짓는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이 동의한, 그렇게 해서 한 번 정해진 장례 풍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장례 풍습은 인간의 가장 보수적인 부분 중 하나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건축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무덤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마르셀 뒤샹이 자신의 묘비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 타인이다"라고 썼듯이, 이 세상의 모든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들, 살아갈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

 동서양의 옛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통된 매장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망자에게 수의를 입히고, 관에 넣고, 땅을 파고, 지하에 묻는 것이다.다만 지상에 드러난 형식이 다를 뿐이다. 이를테면 봉분인가 석재 장식물인가 하는 차이가 있다. 장례 풍습을 정교하고 엄숙하게 제도화하는 데 이바지한 것은 개별 종교의 교리들이다 그중 불교는 망자의 집을 짓는 대신 화장한 시신을 사리함에 보존한다. 망자의 집을 짓는 것은 죽어서 다시 산다는 '부활'을 전제한 것이다. 그곳은 죽음을 환기하는 장소이자 삶의 희망과 절망이 드러나는 곳이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군중과 권력"에서 말했듯이 산 사람이 죽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장소다. 무덤은 죽은 자가 거주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산 자가 살아 있음을 기억하는 곳이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 하나. 새들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장례 풍습 중 하나인 조장은 죽음의 건축을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새들이 주검을 먹고 생기를 얻어 창공을 날아갈 때, 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싣고 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단지 상징만은 아닌 것 같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파란 이유는 물론 물과 공기 때문이지만, 어쩌면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영혼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지구는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들의 무덤일 것이다. 새들의 몸을 빌린 영혼의 여행은 죽음을 사라지게 한다. 127

 

묘지 사례: 헝가리 부다페스트

 죽은 사람들과 시간은 이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 136

 

죽음의 문화: 중국 황화 지역

 북망, 별 무덤들, 부장품, 장례관습. 죽음의 문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죽은 자를 어떻게 떠나보내는가에 따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도 달라진다. 141

 

신성한 것에 대하여

 어느 시대나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신성한 것이 있다. 금기의 율법 없이 신성한 것은 보호되지 않는다. 금기를 명시하거나 기호 체계로 상징을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지속하기 위한 것이다 금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런 규율을 통해 신성한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일 수도 있고 정령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집 안에, 마을에, 도시에 신을 모신다.

 니체가 말했듯이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신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신도 죽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니체는 그렇게 신을 죽였다. 위버멘쉬, 초월적 인간, 영겁회귀의 개념은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다. 현대인은 신을 죽이고 스스로 신처럼 되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신성한 것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의 흔적은 지상에 계속 남아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모셔지는 하나님과 예수, 석가모니 등도 신자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견고한 '집' 속에 거주한다. 신성한 것은 유랑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장소에 정주한다. 그래야 우리가 길을 잃지 않고 '그곳'을 찾고 확인할 수 있다. '기억하고 확인하는 장치' 없이 신은 존재할 수 없다(또한 신은 그 뿌리를 언어의 '집'속에 숨겨놓고 있다. 경전은 숨은 신이다). 역사는 사라지고 시간은 폐허 속에 있다. 지중해 문명의 폐허 속에, 그리스 프리에네의 폐허 속에, 수천 년을 지속한 옛사람들의 신성함이 숨을 쉬고 있다. 고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폐허가 된 이후 더 오랫동안 신전의 증표로 남아 있다.

 성지 순례로 떠난 요르단과 이스라엘에서 수많은 유적을 마주쳤다.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진 유적들은 성지를 확인하는 순례객들의 신발 자국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집과 장소에 대한 해설만 남아 있다고 할까. 예수는 지금 이스라엘의 성지에 있지 않다. 너무 번잡한 나머지 한국의 조용한 사찰로 이주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시대는 성스러운 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듯하다.

 수많은 사람이 비판하는 조선왕조 500년은 그래도 성리학이 있어 신성한 시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것을 인정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남명 조식처럼 의 앞에서 반듯한 기상을 지켜갔던 성리학자들은 신과 초월자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사람을 존경할 방법을 모색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실천하는 '신성한 가치'를 역설했다.

 신과 더불어 사는 것보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지혜를 찾아 나섰던 성리학자들의 태도는 이 시대에도 유용하지 않을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시대는 과연 무엇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가? 147

 

온돌시스템: 터키 페르게

 (...) 경기장이 모두 궁륭 구조의 조합으로 축조 160

 

세례 요한 교회: 터키

 세례 요한의 교회는 진입하는 순서에 따라 공간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준다. 언덕 위에 있는 교회의 폐허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165

 

새로운 도시 이미지: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가 테라소(Olga Teraso) 절단면이 크고 평범한 도로를 이용해 브라질가의 쌈지공원과 주차장을 계획. 도시 해석에 대한 새로운 잠재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 187

 

도시의 긴장감: 우피치 미술관

 베키오 궁 옆으로 이어진 우피치 미술관의 깊고 좁은 중정은 건축과 도시에 긴장감을 준다. 건물의 간격과 길이, 높이가 적절히 조화되면서 땅과 하늘을 극적으로 연결하낟. 또한 각기 다른 차원의 공간(하늘과 땅)을 중첩시키면서 건축적 풍경과는 다른, 비워진 것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긴장감을 창출한다. 213

 

하늘의 설계: 피렌체 거리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품위에 맞도록 집과 도시와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늘을 새롭게 만들었다. 길고, 좁고, 높낮이가 다른 처마들이 하늘을 그린다. 221

 

의미의 생성

 의미는 약속하지 않은 약속이다. 의미는 소통될 때 더 의미다워진다. 그래서 의미를 생성하려면 '약속하려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약속하려면 '쌍방'이 전제되어야 한다. 쌍방이 전제되려면 '소통의 언어' 또한 똑같이 전제되어야 한다. 좋은 '의미'는 '소통'을 지속할 때 더욱 커지고 지속 가능해진다. 이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것이 생성되는 것이다. 생성된 의미는 오래 살기도 하고 때로는 소멸하기도 한다.

 그러면 의미는 어디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언어와 상징 속에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내재된 약속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면 의미는 '장소'에 거주한다. 장소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언어와 상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어도 기독교와 예수의 이야기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 전제 속에서 평범한 길이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궁극적으로 어떤 역사적 장소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장소 그곳에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서만 전달이 가능한 메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들의 '감각'과 '감성'을 통해 나오기도 한다. 감각과 감성이 의미를 느끼고 합성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비유된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 잠시 머물기만 해도 이전에는 체험해 본 적 없는 강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원형 기둥의 거대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원형 기둥으로 채워진 면적과 기둥 사이의 면적이 엇비슷한 데서 오는 공간의 팽창과 진동 때문이다. 몸은 그것을 잡아내고, 그런 효과에 굴복한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에 다다른다.

 의미 생성의 또 다른 축은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지속성을 가진 모든 것들, 그중에서 문화라는 옷을 입고, 시대를 넘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것들은 모두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흔히 전통과 지역성의 범주 속에서 다루던 것들은 시간의 축에서 살아 남은 역사일 것이다. 현재의 시간에 녹아있는 과거, 그리고 현재의 시간으로 앞당겨진 미래를 포함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공유된 가치 속에서 반복되는 동일성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구겐하임 미술관 안의 작은 도서실에서, 또는 빈의 쉔부른 궁처럼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조절된 바로크 시대의 정원과 귀족 취향이 만들어 낸 영토에서, 각별한 의미를 찾아낸다.

 그러나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문법과 체계르 루디흔들어 새로운 본질에 다가서는 것.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실현한 독일관의 건축처럼, 현대 건축 태동기의 새로운 조형언어들은 새로운 의미 체계를 만들어냈다. 반면 동양에서는,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이미 존재하는 자연과 특별하게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의미체계를 만든다. 집으로 바다를 끌어오고, 돌을 가까이 다가서게 하며, 산도 그림으로 만든다. 그렇게 해서 자연은 그대로 두면서도, 사람의 시선과 건축적 장치를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다. 때로는 다솔사 적멸보궁의 운문의 창을 통해서 와불과 부도의 우연한 겹침도 볼 수 있다. 시선은 우연성을 통해서 에기치 못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인간들이 읊어내는 시적 언어만큼 애매하면서도 무한한 의미에 닿는 것이 있을까? 우리의 삶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 가는 여정이다. 삶은 의미를 찾아 떠나는 순레길이다. 의미란 손아귀에 들어온 즉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카뮈가 말했듯이 자실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생이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의미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의미를 만들거나 그에 접속하려고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239-241

 

기억, 집단 기억

 "나의 모든 생각들을 뒤집어 놓은 것은 바로 역학이나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시간개념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는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전혀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실재하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한꺼번에 다 펼쳐 놓는다 해도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인식에는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실증과학이란 본질적으로 이렇게 지속을 제거하는데서 성립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제논의 역설에 의하면, 날아가는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하지 않는다."

 -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 반복과 차이의 운동"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으로 채워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기억'이 아닐까 싶다. 개인은 개별적인 기억으로, 국가나 민족은 집단적인 기억으로 본질을 채우면서 존재를 지속하는 게 아닐까? 개인은 실존하는 인간으로, 국가나 민족은 정체성을 갖는 실체로서 말이다 여기서 두 존재에게 모두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기억이 단절되거나 상실된 상태에서는 개체나 집단이 지속될 구심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치매나 알츠하이머병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은 기억이 사라지면 나의 존재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조차 알 수 없는 비존재의 상태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상실증 환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메모리칩이 일시적으로 고장났으므로 조만간 기억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진단일 것이다 그래야만 생이 지속될 수 있으므로.

 로마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폐허'는 역사의 쓰레기가 아니라 몇 천 년째 지속되는 집단기억이다. 고대 로마는 멸망했지만, 아직도 우리 뇌리에 남아서 오늘날 전 세계인의 '고대 로마'가 되었다. 200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로마의 또 다른 세계화다. 폐허를 통해 로마 제국이 다시 세계의 도시로 부활한 힘은 집단기억이 갖는 지속성에서 나온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관성대'도 그렇고, 옛 서원들도 그렇고,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유적은 집단적으로 학습되어 지속되는 집단기억의 힘이다. 그것이 역사이고, 역사가 늘 현재화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기억은 전쟁의 기억이다. 전쟁터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삶이라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집단기억은 전쟁의 흔적을 몸에 새긴다. 몸으로 겪은 전쟁을 기억 속에서 다시 치러야 하는 이 비극은 전쟁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의 잊고 사는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의 집단기억은 우리에게 '고통의 연대'를 요구한다. 우리들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연대해야 하는 아픔을. 273

 

포룸 노마눔: 이탈리아 로마

 (...) 로마의 폐허는 로마 군대의 힘보다 더 세서 전쟁 없이도 세계를 정복한 셈이다 때로는 집단기억이 폭력을 압도한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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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2. 15:25 기억의 습작

 (아도르노의 말에 따르면 문화풍경(Kulturlandschaft)은)땅 위에 각인된 역사.. 그것이 우리를 진실하게 하는 풍경이라는 것이다.역사의 흐림이 정지된 폐허는 화석화한, 근사한 문화풍경이다. "폐허의 필요성"이라는 책을 통해 고전적 푸역ㅇ의 의미를 현대에서 더욱 확장한 잭슨의 말은 문화풍경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가 쓰길, "폐허는 복원을 위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며 또 원형으로 복귀하게도 한다. 낡은 질서는 새롭게 탄생되는 풍경을 위해 사라져야 한다. ... 역사는 존재하기 위해 중단되는 것이다."(p. 71)


 건축가 민현식은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해 온 정치적 권력, 종교의 힘 또는 무형의 권력인 자본의 위력들이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조물들은 이제 새 시대에는 사라져 주어야 한다"고 했으며, "땅의 조건에서 도출된 형상이 하나의 인자가 되어 주변과 합일된 풍경을 이루는 것, 인간과 자연에 대한 윤리, 이러한 정신은 바로 변화, 전체보다는 개체의 정체성, 일상의 회복을 속성으로 하는 새 천년의 시대, 다중심 다원화의 시대적 가치로 고양되어야 한다. 그래서 천지인을 하나로 인식하여 자연과 합일하려 했던 우리의 전통정신이 오늘에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p. 74)


 모든 땅에는 과거의 기억이 손금과 지문처럼 남아 있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지문(指紋)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무늬(地紋)을 가지고 있다. 더러는 자연의 세월이 만든 무늬이며, 더러는 그 위에 우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새긴 무늬이다. 이는 우리가 땅에 쓴 우리 삶의 기록이며 이야기이다. 따라서 땅은 장대하고 존엄한 역사서이며, 그래서 위하고도 귀하다. 이를 지문(地紋, landscape)이라고 하자. (p. 79)


 건축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운 자의 영광을 만세에 기리기 위해 기념비적 건축이 세워졌어도, 혹은 가진 자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기술적 성취를 이루며 하늘 높이 솟았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겆축도 결국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낼 수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뿐이다. 그것만이 구체적 진실이 된다. (p. 80) 


 이 장소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원래의 땅이 지녀왔던 고유함에 대한 발견이다. 여기에 새로운 소망이 더해져 특별함을 만들고, 결국 여기를 지나는 시간과 사연들이, 이 장소의 풍경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우리들의 선한 기억을 만든다. 건축은 공간으로 구축되지만, 시간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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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16:13 서양사 관련

 논문 수정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관련한 한국어 책 두 권을 살펴보았는데,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당연할 법도 하고, 나중에 나온 책이 분명히 앞서 나온 책을 참고문헌에 기재했으니 별 문제는 없을듯도 하지만(두 책다 별도의 각주는 없음) 유사한 구절들이 보이는듯....해서 여기다 옮겨 적으니까 별로 같아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처음 읽을 때 내가 너무 예민했나?


1.

비스마르크는 처음에 젊은 빌헬름을 높게 평가했지만, 비교적 일찍 황태자의 정치적 소양이 부족함을 탄식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외무부에서 일시적으로 일하게 함으로써 국가활동을 통찰하는 능력을 심어주려고 했다. 그 당시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비스마르크의 이런 생각에 반대했으며, 빌헬름의 '미성숙'과 '불손함'에 대해 언급했다. (몸젠, 최경은 역, "비스마르크", p. 184)


 그러나 젊은 황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아버지보다 낫다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부족한 정치적 소양과 인격적 장애에 대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일찍이 비스마르크가 훗날 국가의 통치자로서의 통찰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왕자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당분간 외무부에서 경험을 쌓도록 자시를 만들고자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황태자이던 프리드리히 3세는 오히려 때가 이르고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러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혹자들은 그때부터 벌써 아들 빌헬름의 미성숙하고 불손한 기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강미현, "비스마르크 평전: 비스마르크, 또다시 살아나다", p. 622)


2.

 이 회고록("상념과 회고") 집필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옛 부하 로타르 부허였다. 그는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구술하도록 유도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를 대충 서술하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구술은 그를 피곤하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야기를 상당히 건너뛰거나 혹은 순서를 바꾸어 구술하기도 했으며, 남의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회고록은 1892년에 완결되었으며, 호르스트 콜이 비스마르크 사후에 이것을 출판하였다. 2권으로 되어 있는 1편은 비스마르크 사후에 즉시 출판되었다. 그의 해임을 다룬 3편은 비스마르크의 희망에 따라 빌헬름 2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철저한 군주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를 비판하면서도 때때로 군주인 빌헬름 황제가 대중들로부터 탄핵받는 것을 근심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3-205)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심심찮게 어려움을 겪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적인 서술에 있어 상세한 면이 부족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건너뛰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설명하는 중에 서로 연관이 없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부허의 남다른 노력이 절실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당대인들을 가급적 관대하게 다루고, 심지어 문제점은 빼기를 바라는가 하면 유산을 비롯한 자신의 문제는 애써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역사를 도구화하는 부분이나 독일 문제와 관련해서 노재상의 고집을 조율하느라 부허는 힘겨워했다. (강미현, 669)


3.

 노년기에 행했던 수많은 발언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항상 겸손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1893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허영심은 인간의 능력을 근거로 하는 담보물이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내적 자산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보려면 우선 허영심을 없애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허영심이 전혀 없었다. 그는 노년기에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대학생 때의 부족한 학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할 경우, 그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에도 불구하고 '군주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 단순하고 온화하게 발언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8)


 그러나 전반적으로 삶에 대한 그의 자세는 신에 의지하며 인간의 참된 내면을 강조하는 쪽이었다. 1893년 "자만으로 지탱되는 능력따위는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비스마르크는 만남에 있어서 항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재임 기간에는 비록 독재적인 지도자였지만 그야말로 자만심이나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심지어 게을렀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열광하는 대중 앞에서 보이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태도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강미현,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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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 20. 17:09 생활의 발견

새누리당이 정권재창출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은 박여사가될 것 같지는 않음. 그냥 뭐 그렇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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