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Gruentaler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수 년 동안 연재되었던 니노미야 토모코의 『노다메 칸타빌레』가 최근 25권으로 막을 내렸다. 지휘자의 꿈을 키우며 노력하고 또 크게 성장할 자질이 있었지만 일본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초조해했던 치아키 신이치와, 분명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공식적인 음악 교육에는 여간 적응하지 못했던 노다 메구미(이하 노다메) 두 사람은 이제 촉망받는 세계적인 신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가 단순히 두 사람이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키우며, 그러는 동안 사랑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만 전개되었다면 이 만화는 큰 인기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독자들에게 크게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만화가 두 사람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같이 꾸려나가는 사람들 사이의 조화와 협력,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같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보통 한 분야의 천재들을 그려내는 작품들은 종종 1)소위 타고난 ‘모차르트’와 노력형인 ‘살리에르’, 혹은 2)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천재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재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따른 대립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즐겨 보았던 - 물론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 일본 만화나 드라마들이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차르트’와 ‘목표가 뚜렷하고 냉정한 살리에르’의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노다메 칸타빌레』가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난 점은 유난히 눈에 띤다. 치아키나 노다메는 슈트레제만을 비롯한 모모가오카 음대의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친구들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들 역시 미네를 비롯한, 어딘가 미숙하고 부족한 S오케스트라의 구성원과 같은, 말 그대로 평범한 ‘주변’ 인물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게끔 도와주며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S오케스트라가 R☆S오케스트라로 진화한 모습이나, 지휘자 데뷔 후 치아키가 맡았던 루 말레 오케스트라가 바닥을 친 뒤 조금씩 왕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마지막 화에서 R☆S오케스트라가 마지막 곡을 공연할 때 지휘자 치아키가 연주자와 한 명씩 눈을 맞춰가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에서 이 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천재를 다루면서 동시에 ‘보통 사람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모여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나 축구를 다룬 작품들도 『노다메 칸타빌레』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이서 함께 하는 내용이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에 비하면 어쩐지 각각의 ‘천재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팀을 이루어 경기를 하며 이기는 것에 그친다는 인상이 든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교학상장(敎學相長) 정신(?)이 유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경쟁위주 입시 교육 때문에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최하위권을 차지했다는 소식(조선일보 2011년 3월 28일)이나, 소위 ‘징벌적 등록금 제도’ 때문에 연이어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카이스트와 같은 우리의 현실과 큰 차이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만화나 드라마는 현실과 다르다. 하지만 창작을 통해 우리가 협력하여 같이 성장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은 아닐까.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