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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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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11. 11:33 기억의 습작

 자본력이 약한 신문은 이른바 진보세력에게도 만만한 동네북인가, 얼마 전에는 해학과 풍자를 담는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난에 쓰인 ‘놈현 관장사’라는 표현에 반발하여 국민참여당 유시민씨가 ‘한겨레 절독’을 말하더니, 최근에는 북한의 3대 세습 문제에 관한 민주노동당의 입장을 비판한 신문 사설을 문제삼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 절독’을 선언하고 나섰다.

 경기도 수원의 한 독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신문은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몰상식한 신문’과 ‘상식적인 신문’으로 나뉘는데, 흥미로운 일은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종종 듣는 데 반해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사람의 ‘조중동’을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될 듯싶지만, 나는 그보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의식이 성찰과 회의, 고민 어린 토론 과정을 통해 성숙하거나 단련되지 않고 기존에 주입 형성된 의식을 뒤집으면 가질 수 있는 데서 오는 경박성, 또는 섬세함을 통한 품격의 상실에 방점을 찍는다.

 신문 논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용히 끊으면 그만일 터인데 소문내거나 선언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이런 경박성에는 진보를 택한 자신에 대한 반대급부 요구도 담겨 있다. 경향이나 한겨레가 자기들 요구에 반드시 부응해야 한다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관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는 일단 지극히 부정적으로 형성되는데, 그중 일부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독서나 특별한 경험을 통해 그때까지 형성한 의식을 뒤집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성찰과 회의, 고민이 생략됨으로써 ‘극도의 부정’이 ‘극도의 긍정’을 낳고 ‘모 아니면 도’ 식의 시각만 남아 섬세함이나 균형감각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북한 내정에 간섭하는 것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게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섬세함까지 필요하지 않음에도 삼대 세습을 비판하면 내정간섭이며 반북이 되므로 남은 선택지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의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심지어 “진정한 진보는 용납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까지 포용할 수 있는 톨레랑스를 가져야 한다”(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박경순 부소장의 말)는 궤변까지 나온다. 톨레랑스는 차이를 용인하라는 것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을 포용하라는 게 아니다.

 북한 관련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에겐 고정관념처럼 떠오르는 말이 있다. 프랑스 파리 15구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의 “고픈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모든 것은 나중에 채울 수 있지만 지금 주린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사르트르가 강조한 ‘지금 여기’에 관심이 더 큰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에 비판적이면서도 북한에 쌀을 보내지 않는 이명박 정권에 더 비판적이며, “권력이 (선출되지 않는) 시장에 넘어간” 한국 사회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기업의 세습 문제와 독재자의 딸 박근혜씨가 가장 강력한 차기 대선후보라는 점을 되돌아보자고 주문한다.

 그러나 통일과업을 지상명제로 주장하고 그것을 진보의 자격조건인 양 강조하는 세력이 북한의 세습체제가 앞으로 굳어질 때 통일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부정이 아닌지 묻고 싶다. 북한 세습체제는 우리의 통일 여정에서 분명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리영희 선생도 지적했듯이 통일은 남북 양 체제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북한의 세습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리는 통일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 간단한 질문에도 ‘말하지 않는 게’ 민주노동당과 당대표의 ‘판단이며 선택’일까

홍세화, 한겨레, 2010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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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블로그질을 안한것을 신문 칼럼 퍼오는 것으로 대신....
읽다보니 괜히 그럼 분단당시 서독에선 이런 얘기가 오고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posted by Gruentaler
2010. 8. 24. 23:35 생활의 발견

어느분의 비난 패턴.

 1. A("문제의 핵심")
 2. B(그 다음에 눈에 보인 문제점이나 사실 큰 문제점은 아님)
 3. C(이 사안과는 관계 없는, 다른 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만)
 4. D(말하는 상대방이 아닌, 다른 관련자에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
 5. E(말하는 상대방에게 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만)
 6. "그래도 너가 열심히 한 것은 알고 있다만", "너가 이렇게 한 것은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뒤늦은 수습)
 7. 다시 A 주제로 돌아옴. 즉, 6번은 다시 비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훼이크.
 8. 이후 E->D->B->C->A->B->D->E..... 당신이 지치실때까지 무한반복.


  특징: 일단 한번 Fire!!하면 자신이 Fire!!했다는 사실에 또 Fire!!하시기(그야말로 분노가 또다른 분노의 원동력이 됨. 이건 뭐 무한동력도 아니고....) 때문에 말그대로 "하얗게 불태울때까지" 반복됨.


  오늘 20분 동안 당하고도 연달아 전화로 또 두 번이나 당하고, 그러다 나도 정신줄을 놓은 나머지 전철에 아끼던 우산을 두고 내린 허탈감에서 쓴 것은 결코 아닙니다. 특정 인물이 떠올랐다면 그거슨 오해.

posted by Gruentaler
2010. 8. 2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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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11. 14:55 기억의 습작


그[아르님]는 심각한데 그것도 마치 죽은 독일인처럼 심각하다. 살아 있는 독일인도 심각한데 그것도 마치 죽은 독일인처럼 심각하다. 살아 있는 독일인도 이미 상당히 심각한 종족이다. 그런데 죽은 독일인이라면 어떻겠는가! 프랑스 사람은 우리가 죽어서는 정말 얼마나 심각해질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죽으면 우리 얼굴은 훨씬 더 길어져서 우리를 파먹는 벌레들도 식사 중에 우리를 쳐다보면 우울해질 정도다. 

 - 하인리히 하이네, 낭만파, 한길사.
 
  너님들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알고 있지만 고치질 못하니 불행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Gruentaler
2010. 8. 3. 11:20 생활의 발견


 어렸을때부터 야구선수들한테 사인받은 공이나 종이가 제법 되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몇차례의 이사와 몇차례의 무관심기간을 거쳐서 사라졌다. 빙그레에 다니셨던 아버지 덕에 이런저런 연줄로 사인을 받았던걸로 기억하고, 또 가끔 야구장가서 오다가다 선수들 만나서 사인도 받았던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을 정리차원에서 사진으로 찍었다. 

 <90년 올스타전 사인구> 사실 선수들이 던져주던걸 내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받았는데 '아주라'정신에 입각하여 친철하게 나한테 주셨다. 다시 만날 일도 없고, 만나도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그저 감사드릴뿐. 굽실굽실.

<이정훈 선수 사인구> 언제 받은 것인지 모르겠음. -_-;;;


<99년 우승 기념 사인구> 정민철-구대성 선수 사인이 있음. 이건 아버지 연줄로 받아냈음. 후후.
 그리고 아마 그 해 우리반에 한화 팬은 나까지 단 두명이었다지.....?


<07년 시범경기때 받은 류현진 선수 사인>



<06년 플레이오프전때 받은 구대성 선수사인> 경기장 들어갈때 사람들이 붙잡고 사인받으려하니 예의 그 쿨앀한 모습으로 "죄송한데 경기장 들어가야해요"라고 하자 "그럼 저까지만 사인 좀..(굽실)"라고해서 받아냈었다.


<2008년 올스타전에서 받은 꽃범호 사인>

<박찬호 메이저리그 100승 기념 사인구>
KBSN 스포츠에 다니던 선배가 이벤트하고 남는거라고 하나 줬다. 뭐 그렇다고.. 박사장님 어서 새로 둥지트시길. 한화오면 그보다 좋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미국에 계시는게 나을듯?

posted by Gruentaler


그렇게 시는 나를 찾아왔지만 - 이창동, 시(2010)


 오늘부터 영어공부 해야지,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해야지, 온라인 게임을 줄여야지 하는 일상적인 다짐을 우리는 늘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일상적인 다짐은 늘 친구들과 한 약속, 회식, 모임 등과 같은 일상적인 다른 일들 때문에 작심삼일도 못가고 ‘내일부터는 꼭’이라는 말로 미루다가 결국 영원히 다짐으로만 남게 된다. 이창동의 『시』(2010)의 주인공 미자(윤정희 분)도 마찬가지다. 길에서 본 시 창작 교실 포스터를 보고 그녀는 그동안 다짐했던 것을 실천하려고 한다. 아마도 미자가 기대했던 시작(詩作)은 파블로 네루다의 자전적 시의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결심을 예기치 않게 방해하듯이, 미자의 결심도 주변 사람들로 인해 계속 방해를 받는다. 딸을 대신해 맡아 기르는 손자로 인해 같은 학교 여학생이 자살한 사건이나, 강노인(김희라 분)의 노골적인 성적인 요구는 현실이 네루다가 생각했던 그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술 더 떠서 용기를 내서 찾아간 시 낭송 동호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딘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시 낭송 동호회에는 수상쩍은 아저씨가 모든 시를 음담패설과 연결시켜 주인공이 생각하는 그 아름다운 ‘시’를 더럽히기까지(?) 하고, 뒷풀이에 참석한 한 시인은 절망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라는 불평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전개다. 하지만 윤정희가 말했듯이, 이런 시련들을 통해서 영화는 “노인들에게는 대화가 없다. 친구도 없다. 그래서 외롭다.”*
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더 나아가 타인과 소통을 못하게 만든다. 외로움은 시의 소재될 수 있겠지만, 소통 불가능성은 시를 쓰기 어렵게 만든다.


 더군다나 문제는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고, 이 문제는 보다 결정적이다. 자신과 소통하는 것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그녀의 호기심은 점차 증가하지만 그와 반비례하여 이것을 표현할 언어적 표현력이나 기억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존재가 없어질수록 세상에 대해 더 자주 더 많이 말을 거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어 미자는 답답해하고(그래서 시를 쓰지 못하고), 또 그런 미자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의에서 비롯된 것이든 타의에 따른 것이든 이러한 미자의 고립은 역설적으로 미자를 자살한 소녀인 희진으로 이끌게 한다. 주인공에게 희진의 죽음은 처음에는 그저 병원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우연한 사건에 불과했지만 점차 자신과 밀접한, 가족과 금전 문제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납득할만한 답을 그 누구도 주지 않고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닫거나 무마시킬 생각만 한다. 결국 미자는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섰고, 이 과정은 시를 쓰기 위한 노력과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그녀가 희진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시는 “어른들의 거짓”*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형사의 역할도 한 몫을 한다. 이 '비호감 형사'가 내부 고발 경력으로 좌천됐다는 사실을 미자가 알게되자 그의 진정성을 깨닫고,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비록 미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는 찾아왔고, 소통의 문제를 겪었던 그녀를 세계와 다시 합일시켜 주었다. 그래서 열린 형식의 결말은 미자는 시를 통해 희진과 동일화 되고 그 거짓을 견디지 못하였지만 그녀와 같은 선택을 취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직접인용한 내용(*)은 모두

고재열,「빵점 시나리오라니? 수우미양가의 수다(윤정희 인터뷰)」, 『시사인』, 143호, 2010. 에서 참고한 것임.

 

 

posted by Gruentaler
2010. 6. 25. 02:01 생활의 발견
오후에 독문학 과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한 학기가끝났다. 그리고 석사과정 수업도 다 끝났다. (당분간) 마지막 수업학기라는 사실때문인지는 몰라도 필요이상으로 스트레스 받아가며 학기마무리를 한 것 같다.

이것저것 방학때 할 것들도 생각하고, 짧게는 1년 길게는 한학기정도 더 논문을 써 나갈텐데 이젠 수업이라는 고삐도 없으니 잘 해나갈지 모르겠다. 학교가는건 점점 귀찮아하고 있고, 시간활용만 잘하면 될것같은데 점점 만사 귀찮아지고 집중력도 떠러지는것 같아서 이것도 걱정이다.

내일 학교가서 빌린 책들 반납하고 일단 다 본책들도 들고 나올 생각이다. 그러고 주말에 책정리를 비롯한 전반적인 방정리를 하려했는데 갑자기 제주도 내려가기로 해서 이건 미뤄야할듯. 제주도 갔다오면 강릉가겠다고 설레발 친 것도 가라앉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방학끝날때나 가야지...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Gruentaler
2010. 6. 22. 21:32 서양사 관련

 독일사의 기말과제는 골드하겐의 책에 대한 서평이었다. 어제까지였는데 어찌어찌하다보니 결국은 오늘 새벽 세시에야 완성을 했고, 어차피 늦은거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더 보고 내자 했던 것이 아침에 한 번 더 보고, 오후에 대학원 친구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해서 다시 검토받고, 오후 네시에야 제출했다............는 줄 알았는데, 내가 선생님 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해서 가지 않았다는 것을 한시간 뒤에 알고 그래서 결국은 다섯 시쯤에 제출을 했다. 물론 선생님이 언제 열어 보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겠지...

 시간을 조금 더 들여서 다시 한 번 천천히 읽고 쓰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뻔하디 뻔한 '그럴 시간이 없'었던 이유도 있고, 사실 이 책은 논점도 그다지 마음에 안들고 계속 같은 주장만 반복하는게 짜증나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안읽었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다만 쓰다보니 독문과 수업 준비하면서 읽은 내용들이 생각나 왠지 모처럼 득템한 것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여기저기 끼워 넣었는데, 제대로 했는지나 모르겠다. 거기다 서론과 결론은 각각 첼란(그는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한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 죽음의 푸가)과 아도르노의 말(구조(救助)하는 것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지옥이 된다. 이 지옥을 이후의 시민들이 스스로 열었다. - 카프카 단상)을 인용을 했는데, 우리의 선하신 신선생님이야 그냥 웃으면서 넘겨줄 것 같지만, 지난 해에 들었던 모 선생님들 같았으면 괜히 쓸데없는 짓 했다고 한마디 써서 돌려주셨을 것 같다는 지레짐작도 해보고..

 하지만 끝내 정하지 못했던 것은 제목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뭔가 책이나 영화 제목이나 기타 각종 유명한 어구들을 조합하면 그럴 듯한게 나오지 않을까 하다가 문득 다시 아도르노가 생각이 났고, 또 벤야민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방통행하는 부정의 변증법" 아... 내가 생각해도 진짜 "허세 돋는다." 

 ...그래도 한 과목 끝냈다. 오늘 중으로 부디 다른 한 과목도 끝낼 수 있기를.
posted by Gruentaler
2010. 6. 20. 20:41 생활의 발견

 종강을 하면 강릉을 가야지. (노선도를 보니 강릉 직전 역이 정동진 역이었음.. 이 서울촌놈 같으니...)
 조금 늦게가면 중고딩 방학에 휴가 성수기도 겹칠 테니, 29-30일쯤 갔다와야지.
 22시 50분 출발 다음날 새벽 04시 57분 도착이라니, 가서 일출을 본다치고, 그럼 그 다음에는 뭘 해야하지?
 유명한 커피골목과 카페가 있다니, 일단 거기간다치고, 그 사이에는 또 뭘한담. 강릉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고, 이래저래 괜히 바람만 잔뜩 들어갔구나.

===

 변함없는 나의 삶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자꾸 헛돌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
 지난 날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나를 괴롭힐 때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게

 언젠가 함께 찾았었던 그 바다를 바라볼 때
 기쁨이 우리의 친한 친구였을 때
 우릴 취하게 하던 그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게

 나는 그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어
 그저 수첩 속에 그 차표들을 모을 뿐
 어느 늦은 밤 허름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속에 숨은 바다를 찾아볼게

 너의 추억이 감당할 수 없도록 가까워질 때
 네가 떠나야 했던 이유가 떠오를 때
 늦은 밤 텅 빈 나의 방에 돌아갈 용기가 없을 때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게

 창고, 강릉으로가는 차표 한 장을 살게
posted by Gruentaler
2010. 6. 13. 20:54 생활의 발견

 괴테처럼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혼자 홀연히 여행을 가는 거다. 물론 그 양반이야 공무에 시달리다보니 작품활동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얘기했지만, 난 좀 다른 이유이겠지. 해남이든, 정동진이든, 강릉이든. 잠깐, 여기를 갈려면 한밤중에 출발해야하니 모두가 다 알겠군. 핸드폰이라도 두고 가야 하나.

 기말 압박에 대한 도피에서 비롯된 생각이긴 하지만, 클래식 기타를 배워봤으면 하는 생각이 예전부터 있었다. 마침 이제 종강하면, 논문 쓸때까지는 수업을 안들을 테니까.. 일주일에 두어번 한두시간 기타배울 시간 정도는 있겠지...응? 그러다 논문학기가 두학기가 세학기 되고 네학기 될려나? 

 지방선거를 보고 동네 시민단체 자원봉사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지만, 이건 뭐 진짜 도피성 망상이 끝까지 간 끝에 다다른 생각이니, 기말과 함께 사라질 생각일듯.

 방학 때 읽고 싶은 책도 눈으로 찍어 두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 자료를 찾아서 읽어야 할 테니 또 많이 읽지는 못하겠지. 아. 그나저나 책장 정리도 해야하는데.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온지 3년이 다되어가는데 '다음 방학에는...'하고 마음만 먹다 한번도 못했다. 뭐 그렇다고.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