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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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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28. 17:12 생활의 발견

꼭 그래야 할 일이었을까
겪어야 할 일이었을까
혼자서 남겨진 방
그 마지막 끝

꼭 그래야 할 일이었을까
떠나야 할 일이었을까
먼저 사라진 그대
또 올 수가 없네

 - 이소라, Track 8

1

 사실 이소라 최근 앨범은 왠지 듣기 불편했다. 제대로 감상하려면 노래 '한 곡'을 들어야 하는게 아니라 음반 전체를 한 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들어야 하는 구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한 곡'을 정해서 들을 수 있다면 'Track 8'정도가 될 것 같다. 

 며칠 전 심야 라디오를 듣다가 나왔다. 맞는 얘기다. 달리 할 말이 더 있을까.

2

 사람이 번잡한 틈을 피해서 새벽에 덕수궁에 갈려고 했으나 전날 늦게 잔 탓에 결국 늦게 일어났다. 그래도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사람들 줄에 서서 기다려야할까 하다가 혼자서 그러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아,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이 간사한 마음) 마침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봉은사에도 분향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거기에 갔었다. 봉은사도 주변이 상업지구니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었는데, 막 점심시간이 지나고 그래선지 한산했다. 인터넷을 할 때 가끔 울컥한 탓에 분향소 가서도 울컥할까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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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25. 14:01 생활의 발견


 2년간의 군생활은 의외로 순탄했다. 아, 물론 부대가 너무 '비밀'부대였던 나머지 정작 해당 부대원들도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부대여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확실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줬던 것 보다는 훨씬 무난하게 군 생활을 마쳤다는 점이다.

 딱히 이유가 있었는가? 그 흔한 군인정신으로 지목되는 '참을 수 없으면 즐겨라'로 그랬던가? 그건 결코 아니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런 정신 가지고 있어도 1분 후면 '전향'하게 되는게 군대의 현실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체념에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가령 '바로 지금 여기가 최악이고, 빠져나갈 구멍은 없으니 별 수 있나?' 이런 자세. 혹자는 이런 자세야 말로 긍정적인 자세라며 '참을 수 없으면 즐겨라'와 묘하게 연결시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주의는 긍정적이지 않은 체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둘은 엄연히 다르다.

 나름 이런 위장작전(?)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군대에는 만만치 않은 사람도 오는 법, 이런 나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냈던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나의 연기를 간파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그냥 자기들 기준에 내가 '비호감'이라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이 최악'이라는 체념적 입장은 그 뒤로 생각의 출발점이 된 것 같다.

 사실 그 누가 나와도 나의 정치적 입장을 완벽하게, 하다 못해 50%라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년 전 나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 투표에 참여 할 수 없음으로 인해 --- 새로 뽑힌 대통령이 무척 마음에 안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잘해줬으면 했었다. 하지만 혹시나 했던 우려는 역시나, 점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현실화되었고, 그때마다 분노와 안타까움과 짜증이 마구 뒤섞였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또 생각을 했었다. '이제 볼거 다봤는데 더 최악의 상황이 닥칠까'...만은, 이런 기대는 좀 저버려줘도 아무도 욕하지 않으련만 꼭 기대에 부응해주고 있다. 사실 지금도 '지금 보다 상황이 더 악화될까'하고 있긴하지만, 글쎄, 이미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서정시가 사라져 버린 시대'에서는 오히려 지금이 '좋았던 시절belle Epoque'임을 알아두고 "현재를 즐기는게carpe diem"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또 어떤 충격과 공포가 다가올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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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23. 23:55 생활의 발견

 2년 전 이맘때 쯤,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었다.

 잊으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 같다. 사실 또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된다고, 생각보다 빨리 잊어버렸었던 것 같았다. 1년 동안 독일에 있었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내가 죽는 것 만큼 가장 두려워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남이 죽었다는 사실에는, 돌이켜보면 죽은 사람과의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들 정도로 무감각하다는 것은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2년 뒤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보았다. 투표권도 없던 주제에 그래도 그 사람이 됐으면 했었다.  그러고 남들처럼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일견 이해는 하면서도 실망도 했었다. 그래도 능력이 될지 모르겠지만 유사 전공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나중에 평전을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할 말이 있다하더라도 해야알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에게는 5월이 잔인한 달이 될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한 가지 흠집을 무마하는데 열 가지 세계관을 내세워 낯빛 한 번 바꾸는 일 없이 스스로를 지켜낸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한 줌 봄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원망하다 끝내 주변과 스스로를 망친다. 비아냥 섞인 세상의 손가락은 주로 후자를 겨냥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자멸하는 순간, 세상의 손가락들은 가장 빠르고 침통하게 애도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제한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살아남기에 세상은 너무 어른스럽고, 아프다.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퍼온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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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5. 22:31 생활의 발견
 시간 있고 날씨 좋을 때 예전에 살던 동네를 한번 가봐야지 했는데, 결국에는 시간 없고 날씨가 좋을 것 같지 않은 내일 그 쪽으로 갔던 겸해서 가게 될 것 같다. '시간이 없'다고 말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내일까지 서평 준비를 목표만큼 해야 약간은 마음 편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솔직히 지금 상황봐서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아무튼, 그래도 10분 정도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어렸을 때 살던 곳이라고 해봤자 별 다를 바 없는 아파트 단지일 뿐인데, 가서 또 쓸데없는 미련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그걸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내일 할 일이 상당히 거창해보이지만, 결국 노는일이다. 친구랑 야구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니까, 혹시나 그 동네 가게가 문이 열어있거든 거기서 주전부리를 사는게 조금 더 쌀테니까, 겸사겸사.

 내일 일은 사진기를 가져가서 찍을 생각인데, 그 사진과 함께 이야기를 더 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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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0. 20:10 (독)문학 관련

»Zu vollenden ist nicht die Sache des Schülers, es ist genug, wenn er sich übt.«
"완성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일이 아니야, 배우는 사람은 연습으로 충분해."  - Goethe, Wilhelm Meisters Lehrjahre

 쓰기 시작하지도 않은 미국사 서평에 스트레스를 앓고 있으면서 위안이 되던 문구. 뭐 그렇긴 하지만 서평 과제 도서를 아직 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책이나 읽고, 오늘도 집에서 놀아버린 주제에 연습 운운하면서 위안을 삼기엔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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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2. 23:23 서양사 관련

 나, 하인리히, 국왕은, 우리의 군주인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정하고자 하는 규정들 안에서 독일 왕국의 대주교들과 주교들, 공작들과 백작들 그리고 다른 영주들이 나를 고소하였던 불평과 불화에 대하여 교황의 결정에 따라 사죄를 할 것이며, 그리고 그의 충고에 따라서 - 몇 가지 명백한 장애들이 그나 내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이상 - 조정안을 만들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완성되면 나는 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즉, 만약 앞서 말한 군주인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그가 안전해질 수 있는 산맥들이나 다른 곳을 넘어 가기를 원하게 된다면 나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된 한에서, 그는 - 그 자신이나 그와 함께 있거나 그에 의해 보내지거나 어떤 곳으로부터라도 그에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 - 앞으로의 생명이나 신체의 부상으로부터 그리고 구속으로부터 올 때, 머무를 때, 혹은 갈 때 그는 안전할 것이다. 나의 허가 없이 그는 자신의 명예에 대치되는 어떤 방해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러한 방해를 하게 될 때, 나는 나의 모든 힘으로 교황의 조력자가 될 것이다.



Gregory, "34 Henry's oath at Canossa  (Jaunary 1077)", trans. E. Emerton, Correspondence, pp. 112-13,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Toronto, 1988, pp.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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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2. 22:51 서양사 관련

 정의의 사랑을 위하여 여러분들은 우리와 함께 같은 대의를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봉사의 전쟁 안에서 같은 위험을 감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탈리아 입성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의 과정에 대한 이 확실한 이야기를 당신들에게 보내어 특별한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보낸 사절들과 함께 만들어진 타협안에 따라 여러분들의 지도자들 중 몇 명이 우리를 관문에서 만나게 되는 날의 약 20일 전에 우리는 롬바르디아로 와서 그 지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그들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불안한 시기들 때문에 - 실로 우리가 꽤 믿고 있는 대로 - 우리에게 보낼 수 있는 수행원이 없으며 여러분들에게 다가갈 다른 방법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경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국왕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확실한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사면과 사도의 축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과 성 베드로께 사죄를 드릴 것이고 삶의 그의 방식을 개선할 것과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을 계속하기를 제안하는 말을 전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답을 늦췄고 사절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그 스스로의 협약에 대한 도리에 어긋난 행동에 때문에 그를 여러모로 몹시 비난하며 오랜 협의를 하였고, 적개심이나 반항의 어떠한 기색 없이, 그는 우리가 머물고 있었던 카노사의 요새로 몇몇의 수행원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곳에서, 3일 동안, 성문 앞에 서있으면서, 곁에 모든 국왕의 기장을 두고, 맨발과 조악한 차림새로, 그는 사도의 도움과 위로를 참석해있던 모든 사람들과 이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동기를 청원자들과 눈물들로 탄원하는 동정과 연민으로 마음을 움직일 때까지 많은 눈물로 간청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이례적인 엄격함에 놀랐고,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교황의 권위의 진지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개한 폭군의 잔인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끊임없는 회개의 모습과 모든 사람들의 재촉에 굴복하여, 우리는 그로부터 아래에 명시한 보증들을 받아들여 그를 파문의 속박에서 그를 풀어주었고 그를 성모 교회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 그리고 이 사안들은 매듭지어진 지금, 우리는 여러분들의 지역에 기회가 있는 대로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보다 완전히 교회의 평화와 세계의 선한 관례에 관계되는 모든 사안들을 확립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문서화된 보증들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협의들은 미결되었고, 우리의 앞으로의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의가 없는 동의는 대단히 높은 수준에서 필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여러분들이 정의를 사랑하듯이, 선한 믿음 속에서 여러분들이 갖게 된 의무들을 다하고자 노력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이 - 우리의 관례가 그렇듯이 - 정의를 통해서이든 자비를 통해서이든, 그리고 그나 우리 자신의 영혼에 위험이 처하는 것 없이 그가 자신의 안전과 명예를 위해 우리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명백한 진술을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서도 국왕에게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Gregory, "33. Letter of Gregory to the German princes giving an account of the incident at Canossa (Jaunary 1077)", trans. E. Emerton, Correspondence, pp. 111-12, Brian Tierney, The Crisis of Church and State 1050-1300, Toronto, 1988, p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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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9. 00:06 생활의 발견


 결혼식에 종종 불려갔다는 얘기는 전에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문상 갈일도 많아졌다. 올해만 해도 세번째 문상이었다.  기쁜 일이 아닌 슬픈 일로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다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래서 더 찾아가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더 '내키지 않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아직은 고인이 되신 분 때문에 가는 일 보다는 남겨진 사람들 때문에 갈 일이 더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고인이 되신 분은 내가 입학하기도 전에 정년퇴임하시고 명예교수로 계시던 분이다. 그냥 문상만 가면 끝날 일이었겠지만, 지도교수님의 지도교수님 정도 되시는 분이니 나에게는 Master Grossvater쯤 된다고 해야 할까나, 그래서 다른 대학원생들과는 달리 오래 머물렀었고, 장지까지 따라갔었다.

 이전까지 장지까지 다녀온 것은 고3 올라가는 해 겨울에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는 예비 '고3'이라는 일종의 특권 덕택에 마지막 날 발인 직전에만 가서 장지까지 갔었는데, 그 때에 비해서는 훨씬 조용히, 그리고 (추측컨대) 약간 더 시간이 걸렸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늦게 출발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모든 절차가 끝나고 공원 묘지 앞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쉬면서 선생님께 고인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들었었는데, 돌아가시기 일주일전까지도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것을 예상하지는 않으셨고, 조만간 상태가 호전되면 책을 쓰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20대, 30대, 그리고 지금 자신 조차도 하루 하루는 참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돌아가신 선생님께서는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할지, 그러니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잘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마무리를 지으셨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오히려 이런 곳에 와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그런 말씀이셨다. 하지만 그래서 또 조금은 더 귀를 기울여 듣게 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실 버스만 타면 멀미를 하는지 금방 잠이 들곤 해서 잘 몰랐지만, 잠깐이나마 깨어 있을때 보았던 서울 근교의 모습과 공원 묘지 주변의 모습은 이제 정말 봄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봄도 그 별것 아닌 하루만큼이나 짧기 때문에, 아마도 보름 후에는 여름의 기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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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2. 00:17 생활의 발견
만우절이다. 싸이월드는 보이는 곳 잘 안보이는 곳 곳곳에 장난을 쳤다. 하지만 나는 딱히 그럴 듯한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느날과 다름 없는 하루를 보냈다. 유머감각이 죽어서는 아닐 것이다. 하도 거짓말 하고 맨날 오해다라고 노래부르는 누구 때문인지 만우절이라는 사실 자체가 거짓말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호 통재라 이젠 만우절에 거짓말을 못하는 지경이 이르렀구나.  

  사범대~인문대~중도~학관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쳤던 수 많은 교복입은 무리를 보면서 갑자기 소풍왔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정도였다. 한참 있다가 '아, 만우절!'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들을 지나치면서 나도 09학번이고, 교복이 없던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내가 지금 입은 옷도 교복이며, 나도 신입생으로서 교복데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래서 몇 명한테 만우절 멘트로 시도했었다. 하지만 별로 신통치 않았다. 차라리 평소대로 개그하는게 반응이 더 좋았다는 사실에 약간은 우울해졌다. 그 참에 같이 중세사 수업을 듣는 박모양을 졸지에 예비군 훈련갔다가 무좀 걸려서 고생하게 만들어 웃음거리로 하여 미안해졌다........고 하면 뒤늦은 만우절 농담이 될려나?

 사실 요 며칠 사이에 약간 기분이 급저하됐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전적으로 설레발에 가까운 내 망상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기분좋게 꿈꾸다가 일어나보니 현실은 시궁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반대더라,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무력감이나 피곤함이 실제로 그런 것보다도 배로 느껴지는 것 같고. 드라마나 책 보면 이럴때 사람들은 '뭐 잘못 먹었나' 싶을 정도로 자기 하는 일에 집중하던데, 나도 '이럴때 아니면 언제 그러겠냐'며 해볼려고 했지만 그리되지 않고 있다. 역시 이래서 드라마가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하는거다.

  쓰고 있는 사이에 12시가 넘어갔다. 신데렐라처럼 만우절도 끝났다. 그리고 싸이데이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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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28. 00:45 생활의 발견
작년에는 청첩장을 8월에 한 번 받았지만 올해는 석 달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이번이 두번째다. 이러다 이대로 올해에 몇 장의 청첩장을 더 받게 될지 잘 모르겠다. 내일 결혼식 간다고 집에 얘기를 하니, 나도 나이가 나이니 얼른 좋은 사람 만나라는 농담치고는 뼈가 너무 굵어 맞는 사람 좀 다치게 할, 그런 말도 덤으로 들었다. 그래도 20대 이후로 연애 안한 기간은 단 1년 반 뿐인데, 이 정도면 꽤나 부모님께 대인관계에 대한 신뢰를 여전히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약간은 우울해졌다.

 내일 결혼하는 H선배는 독문과 교양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이다. 혼자 듣는 수업에서 무작정 아무 조에 꼈는데 알고보니 과/반 모 선배의 대학신문사 후배였고, 그 선배의 험담아닌 험담(?)으로 급친해졌던 것 같기도하고. 사실 그 수업에서 끝날만한 인연이었을 법한데도 계속 연락이 됐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이시고 독문학도 좋아해서 독문과 대학원도 잠깐 생각해본다고 했지만, 언어의 한계 때문에 단념했다고 했었다(사실 나는 그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교양 수업을 들었던 그 선생님 때문에 속으로는 잘 생각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사실 연락을 계속했다고는 하지만, 군입대 이후로 서로 학교에 있는 기간이 달랐기 때문에 그 뒤로 직접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싸이월드가 전부였고, 그러다 보자, 보자 서로 말 그대로 노래만 부르다 두달 전에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헤어질려고 자리를 일어설 때쯤 우스개소리로 '아버지 연세가 연세다 보니 걱정 좀 덜어드릴려고'라며 3월에 결혼한다고 그랬다. 농담이었지만 어깨 너머로 꽤 오래 사귀었던걸로 알고 있는데, 당연한 수순일게다.


 얼마 뒤 청첩장을 받을 주소를 가르쳐주고, 또 얼마 뒤 청첩장을 받았다. 청첩장 안에는 또 작은 청첩장이 들어있었고, 여자든 남자든 같이 올 사람이 있으면(단 한명이 있는데, 위에서 말했던 험담의 대상이었던 그 선배 뿐이다.) 같이 오라는, 결코 친절하지만은 않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두달 전에 만나서 '신랑/신부측 커플-솔로 스티커 붙여서 알아서 좋은 인연들 만들어 가라는 이벤트를 생각중이다'라는 얘기는 이에 비하면 말 그대로 덕담이었다. 청첩장 블로그를 만든 것도 부족해 이틀 전에 문자까지 받았으니, 이정도면 발병이 나더라도 가야 할 듯하다.


 남의 결혼 이야기는 이쯤 하고, 꼭 굳이 부모님 한말씀이 아니더라도 아직 서른은 안됐을 지라도 20대 후반이 된 마당에 결혼은 아직 나의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남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된 것은 실감하고 있다. 최근까지는 '뭐, 그래, 하면 좋고 못하면 할 수 없는거지'했다가 어느 순간에 '안하면 정말 뭔가 찌질해질것 같다'라는 강박관념(?)으로까지 바뀌어 '하고 싶다'와 '해야 한다'가 묘하게 뒤 섞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 '내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처음에는 그저 아직 무수입의 궁핍하지 않은 시대의 궁핍한 학생이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책임감' 때문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가와 함께 진심으로 좋아해서 앞으로 살아온 날 그 이상으로 항상 같이 있고 싶어할 수 있을까하는 내 자신의 진정성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결국에는 '내가 매사에 과연 얼마만큼 진지하기나 했나'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뭐가 알 수 없는 회의감까지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이 걱정 또한 나만의 문제가 아니길 하는, 모처럼 진지해졌다 다시 무책임해지는 생각으로 매듭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매듭을 지어서 안될 일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정말정말 좋아서, 혹은 그저 아버지 걱정 덜어들이려고 그런건지, 아니면 모 웹툰에 나온대로 '이 만큼 오래 사귀었는데 포기하면 아까워서'그런 것인지까지 알지도 못하고, 이 블로그를 찾아 올일도 없겠지만, 모쪼록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 "좋아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다는,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희망사항"을 지속시키길 말이다."(법정, 함께 있고 싶어서) 아, 물론 이 말은 과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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