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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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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여인을 다루었다기 보다는 철"이었던" 여인을 다루었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듯.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화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한 이유도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싶다. 11년 수상의 공과를 단편적으로 주마간산으로 그려내서 한편으론 예전에 HBO서 처칠을 다뤘던 "Into the storm"처럼 수상 재임기만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을 것같기도 하고. 

 그래도 수많은 혹평(?) 덕에 기대를 안하고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재미있게 봤었다. 한창때는 미국사람들처럼 과거에 연연하지말고 현재와 미래를 봐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과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대조되는 모습은 영화를 더 서글프고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고. 물론 그 씁쓸함은 "왕년에 철의 여인"을 매우 잘 소화한 메릴 스트립덕이고. (그러고보니 이 영화를 보는 순간 메릴 아주머니는 지구 반대편에서 상을 받고 있었다나 뭐라나)

 이건 영화와 관계 없는 이야기고,  나야 학부때 영국사를 사파(?)로 들었으니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대처나 대처리즘은 그냥 '어려울 때는 원칙에 충실하라'라는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특히 정치인한테는 수행하기) 어려운 명제를 따랐던 것이 아닐까싶기도 하다. (다만 내가 그 원칙자체에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래저래 생각해보면 대처의 해결방식은 그냥 선생님이 하라는대로 하고 학원 안다니고 8시간 자고 국영수 위주로 열심히한 모범생의 전형적인 답이랄까? 열심히하면 80점은 받아도 100점을 받지 못하는 뭐 그런...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대처는 굉장히 원칙대로 하고 자신의 원칙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뭐 그런게 보수주의라면 제대로된 보수주의겠지, 싶기도 하겠다...싶다가도 주변을 둘러보면 참 이래저래 씁쓸한 기분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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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년 동안 연재되었던 니노미야 토모코의 『노다메 칸타빌레』가 최근 25권으로 막을 내렸다. 지휘자의 꿈을 키우며 노력하고 또 크게 성장할 자질이 있었지만 일본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초조해했던 치아키 신이치와, 분명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공식적인 음악 교육에는 여간 적응하지 못했던 노다 메구미(이하 노다메) 두 사람은 이제 촉망받는 세계적인 신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하지만 『노다메 칸타빌레』가 단순히 두 사람이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키우며, 그러는 동안 사랑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만 전개되었다면 이 만화는 큰 인기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독자들에게 크게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만화가 두 사람뿐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같이 꾸려나가는 사람들 사이의 조화와 협력,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같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보통 한 분야의 천재들을 그려내는 작품들은 종종 1)소위 타고난 ‘모차르트’와 노력형인 ‘살리에르’, 혹은 2)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천재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재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따른 대립을 통해 전개된다. 특히 즐겨 보았던 - 물론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 일본 만화나 드라마들이 ‘인간적이고 따뜻한 모차르트’와 ‘목표가 뚜렷하고 냉정한 살리에르’의 갈등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노다메 칸타빌레』가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난 점은 유난히 눈에 띤다. 치아키나 노다메는 슈트레제만을 비롯한 모모가오카 음대의 교수들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친구들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인공들 역시 미네를 비롯한, 어딘가 미숙하고 부족한 S오케스트라의 구성원과 같은, 말 그대로 평범한 ‘주변’ 인물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게끔 도와주며 같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S오케스트라가 R☆S오케스트라로 진화한 모습이나, 지휘자 데뷔 후 치아키가 맡았던 루 말레 오케스트라가 바닥을 친 뒤 조금씩 왕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마지막 화에서 R☆S오케스트라가 마지막 곡을 공연할 때 지휘자 치아키가 연주자와 한 명씩 눈을 맞춰가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모습에서 이 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다메 칸타빌레』가 천재를 다루면서 동시에 ‘보통 사람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모여서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나 축구를 다룬 작품들도 『노다메 칸타빌레』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이서 함께 하는 내용이지만, 『노다메 칸타빌레』에 비하면 어쩐지 각각의 ‘천재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팀을 이루어 경기를 하며 이기는 것에 그친다는 인상이 든다.

 『노다메 칸타빌레』의 교학상장(敎學相長) 정신(?)이 유난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경쟁위주 입시 교육 때문에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최하위권을 차지했다는 소식(조선일보 2011년 3월 28일)이나, 소위 ‘징벌적 등록금 제도’ 때문에 연이어 학생들이 자살했다는 카이스트와 같은 우리의 현실과 큰 차이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만화나 드라마는 현실과 다르다. 하지만 창작을 통해 우리가 협력하여 같이 성장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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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해서 <부덴브로크가 사람들>로 시작해서 <보바리 부인>으로 가더니 <인형의 집>으로 끝나는 분위기다.

배우, 스토리, 화면 다 나쁘지는 않았는데(최근 본 영화 중에서 '싱글맨' 다음으로 시종일관 - 시쳇말로 - '우아돋는' 영화인것같음) 흠이 있다면 영화 음악. 사실 영화 음악만 놓고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진 않은데 뭔가 사람 부담스러울정도로 몰아가려는 무언가가 있음. "자식들아, 긴장타라!" 이런 느낌. 근데 막상 긴장탈 정도로 대단한 일은 안벌어짐. 뭐랄까 약간 옛날 영화/극 처럼 구성을 한 일환에서 그런 거라면 약간 이해가 될법도 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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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만추》의 주 무대인 안개 낀 시애틀은 주인공에게나 관객에게나 상당히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시애틀의 특산물인 - 『무진기행』의 무진처럼 - 안개는 모든 것을 흐리게 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주인공 두 사람의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연출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서양 도시가 만든 몽환성을 통해 두 동양인의 이질성을 더욱 돋보인다.

 그러나 시애틀이라는 환상적인 배경은 영화의 서사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만추》는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그 부족함을 관객들은 시애틀의 낯선 느낌, 혹은 두 사람의 이방인성을 통해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 설명의 부재를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에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제법 현실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환적인 이야기라고 하기는 현실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하기는 상황 연결이 충분히 논리적이지 못한 탓에 영화는 그 사이에 낀 채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장면의 전환들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전후의 장면들이 영화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우선 시애틀 시내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놀이공원에서 마주친 다른 두 남녀의 대화를 상황극(?)으로 이어 받으면서 교감을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상황극은 현실감 있게 시작하다가 두 남녀가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가 환상적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훈과 애나 두 사람이 파한 유령시장골목을 질주하는 장면으로 갑자기 바뀐다. 이 시장에서 애나는 독백조로, 그리고 모국어로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훈의 어림짐작을 통해 대답한다. 이 장면 두 사람이 교감하는데 언어와 같은 장벽이 방해가 되지 않음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은, 개별 과정들로만 보면 인상적이지만 한 데 어울려 보면 어딘가 납득하기 힘든, 파편화된 인상이다.

 어색함은 애나의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드러난다. 길에서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졌던 두 사람이었는데, 훈은 어떻게 장례식장을 알고 찾아갔을까? 물론 신문 부고를 통해, 낯선 중국계 이름을 쉽게 찾아 알았으리라는 추정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시애틀은 대도시가 아닌가. 시애틀에서 처음 다시 마주쳤던 것까지는 정말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하더라도, 아무런 연고 없는 두 남녀가 세 번째로 만나는 것마저 우연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장례식을 마친 뒤 훈과 애나, 왕징과 그의 부인의 대화는 왕징의 부인도 훈의 거짓말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을 법 함에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그 부분도 사실적이라고 납득하기 쉽지 않다. 훈과 왕징 두 사람이 실제로 싸운 이유를 감추기 위해 둘러댄 “포크 변명”은 희극적이지만 동시에 애나가 영화 내내 억누르고 있던 비극적인 감정을 유일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쓰러져 오열하는 애나를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러다 장면은 다시 한 번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두 사람이 터미널로 가는 장면으로 바뀐다.

 이후 애나와 훈 두 사람은 다시 버스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도시를 떠난다. 이 모습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인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나의 위치를 물어보는 간수의 전화, 그리고 훈의 소재만을 파악하고 말없이 끊은 옥자 남편의 전화로 안개 속 휴게소에서 현실로 붙잡혀 돌아온다. 하지만 이 전화들도, 특히 훈이 받는 전화는 어딘가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한 번 더 현실로 끌어내리는 일종의 확인사살과 같은 느낌이다. 차라리 애나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훈이 옥자 남편에게 죽임을 (아니면 적어도 발길질이라도) 당했더라면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더 균형을 맞출 수 있지 않았을까.

 시애틀에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수 년 만에 돌아온 중국계 애나와, 무언가에 쫓기며 흘러들어왔던 코리안 지골로 훈은 어쩌면 유령투어를 하다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관광객들이 생각했던 대로 정말 유령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애나는 어머니가 죽은 뒤 재산 분배 과정과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은 현실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훈은 애나에게 고객이 원하는 모습이 무엇이든 다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애나는 훈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러한 애나의 무(無)요구에 훈이 자연스러운 본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애나는 훈에게 자신처럼 유령이 되어달라고 요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시애틀의 유령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두 유령에게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으라고 계속 강요하고 있는 느낌이다. 훈이 조금 더 유령과 비슷했다면, 혹은 영화 시간을 줄였더라면 시애틀에 만난 두 사람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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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의 미국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을 다룬 드라마 《더 웨스트 윙The West Wing》(1999~2006 방영)의 다섯 번째 시즌(2003~2004 방영)은 재선에 성공한 해와 그 다음해 까지를 다룬다. 전체 8년 임기 사이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이 기간은 처음 당선했을 때보다 행정부가 자신의 아젠다를 보다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초반 4년은 집권 2년차에 실시하는 중간선거와 재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집권 2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정권 재창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 이르면 임기 첫해만큼의 참신함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초선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통령이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석참모진 대다수에게조차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 행정부는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격렬한 도덕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은 이 문제를 극복하였고, 지난 4년 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하여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보다 확실하게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다섯 번째 시즌은 다른 어느 시즌들보다 백악관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즌은 오히려 백악관보다는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상대인 공화당,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주당) 행정부의 시각에서 본’ 공화당에 중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전 시즌에 걸쳐서 백악관은 의회를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하며 로비를 벌이며 정책을 견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내부의 결집을 꾀하고 표 이탈을 막으려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고, 공화당과 관련해서도 공화당 전체보다는 개개의 온건한 경향의 공화당 의원들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공화당의 지도부가 백악관의 협력대상으로 전면에 부상한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 화에서 대통령의 딸이 약에 취한 채 근본주의 이슬람 과격 단체를 자처하는 집단에 의해 납치를 당했고, 부정(父情)에 이끌려 잘못된 상황대처를 할까 우려한 대통령은 권한을 수정헌법 25조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일시 위임한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부통령은 납치 직전에 성추문이 발생하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기 때문에, 헌법상 그 다음 계승자인 공화당 소속의 하원 의장 워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의 딸의 무사를 염려하는 것과 동시에 공화당이 일시적으로 행정부를 장악한 틈을 타서 공화당이 원하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을 아닐지, 나아가 자신들의 정책들을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위기 앞에서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강경하게 사태에 대응하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아랍 국가에 있는 해당 테러 단체의 근거지를 폭격하여 테러 단체를 압박하고, 일말의 타협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편 워킨은 보좌진들의 우려와는 달리 부통령 인선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종전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았다. 잠깐이긴 해도 일시 권력을 잃어 전전긍긍했던 백악관의 참모진들은 오히려 소심하고 속 좁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화당의 처신은 대범했다.

 이후에도 공화당은 당면한 주요 현안에 대해서 국정운영의 협력자로서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는 연방 대법원과 사회 연금 개혁안이다. 연방 대법원장의 노쇠와 다른 대법관의 사망으로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자 공화당은 두 자리를 모두 보수 성향, 혹은 적어도 중도 성향의 판사를 지명하도록 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었지만, 강경 보수 성향의 판사를 대법관을 앉히는 대신에 대법원장 자리를 진보 성향의 여성 판사에게 양보함으로써, 연방 대법원 내 좌우의 균형을 맞춤과 동시에 ‘첫 여성 연방 대법원장’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사회 연금 개혁은 앞으로 닥칠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큰 파국을 초래할 것인지 양당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당의 성향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익단체들의 주장이 첨예하고 대립하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먼저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비록 백악관이 비밀리에 물꼬를 터서 이 사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문제를 다룰 의사가 있고 양보할 여지도 있음은 공화당측이 먼저 보였기에 가능했었다. 오히려 백악관이 예전부터 이러한 공화당 의원들을 ‘때리기’에 몰두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양당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물론 공화당이 항상 이처럼 대범한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공화당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워킨에 이어 하원의장이 된 해플리는 보다 보수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자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관철시켰고, 여기에 힘을 얻어 한걸음 더 나아가 감세를 적극 주장하였지만, 결국 지나치다고 생각한 대통령이 타협을 거부, 연방 정부의 폐쇄에 한 몫을 하였다. 공화당은 연방 정부 폐쇄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물었고, 실제로 얼마동안은 그 주장이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너무 욕심을 낸 나머지 동정여론과 정당성을 확보한 대통령이 주도권을 되찾음으로써 ‘독박’을 쓰기도 한다.

 이처럼 ‘쿨’하지 않은 면모를 보이기도 종종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웨스트 윙》의 다섯 번째 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리당략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민주당의 믿을 수 있는 이상적인 파트너로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양당 출신의 전직 대통령들이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에 대하여 다소 방법은 엇갈리긴 했지만 현직 대통령에게 근본적으로, 종전의 경제/전략적인 관계를 넘어설 때가 됐다고 조언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링컨이 이 에피소드에서 계속 언급된다는 점이다. 사망한 대통령이 링컨을 가장 존경했고, 고인이 대통령에게 남긴 유언에서 중동 문제에 대해 조언하면서 링컨을 언급했다는 점, 그리고 링컨 재임기의 내전이 에피소드의 부수적인 이야기로 언급된다. 내전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자유와 민주주의와 같이 전형적인 미국적 가치로 인식되는 것들이 링컨과 공화당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망한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원은 그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일하게 했었고, 그래서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더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에서, 이상적인 공화당의 모습을 재차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 행정부를 주인공으로 다루면서, 이 드라마는 반동역할을 하는 공화당을 이렇게 묘사하였을까? 이상적인 대통령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 바틀렛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트지만, 그렇다고 독선적이지도 않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구식 유머를 즐기는 인간미 넘치는 세 딸의 아버지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철인(哲人)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설정되었다.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한층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도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그 긴장감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의 절정은 이후의 두 시즌에서 등장하는 공화당 소속 대선 후보 아놀드 비닉을 통해 나타난다. 5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의 “대인”과 같은 모습은 비닉의 등장을 위한 초석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드라마 안의 가상의 정치판과 현실의 정치판의 상호 작용에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현실의 정치가 드라마만큼이나 신사적이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정치가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들이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은 거꾸로 현실 정치가들에게 하나의 룰 모델로 제시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이상적인 정치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줄 것을, 또 정치가들에게는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바틀렛 대통령의 집권 5-6년차는 이렇게 지나갔다. 이 기간은 행정부가 당차게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그 시기를 놓쳤고,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것을 겪어나가면서 바틀렛은 대통령으로서 더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성장은 절친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멘토 역할까지도 하였던 비서실장인 리오 맥게리와 점차 미묘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 성장은 ‘공화당’ 못지않게 이 시즌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임기는 2/3선을 넘어섰고, 그는 이제 연착륙을 준비해야만 하는 시점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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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는 나를 찾아왔지만 - 이창동, 시(2010)


 오늘부터 영어공부 해야지,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해야지, 온라인 게임을 줄여야지 하는 일상적인 다짐을 우리는 늘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일상적인 다짐은 늘 친구들과 한 약속, 회식, 모임 등과 같은 일상적인 다른 일들 때문에 작심삼일도 못가고 ‘내일부터는 꼭’이라는 말로 미루다가 결국 영원히 다짐으로만 남게 된다. 이창동의 『시』(2010)의 주인공 미자(윤정희 분)도 마찬가지다. 길에서 본 시 창작 교실 포스터를 보고 그녀는 그동안 다짐했던 것을 실천하려고 한다. 아마도 미자가 기대했던 시작(詩作)은 파블로 네루다의 자전적 시의 이미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결심을 예기치 않게 방해하듯이, 미자의 결심도 주변 사람들로 인해 계속 방해를 받는다. 딸을 대신해 맡아 기르는 손자로 인해 같은 학교 여학생이 자살한 사건이나, 강노인(김희라 분)의 노골적인 성적인 요구는 현실이 네루다가 생각했던 그 아름다움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술 더 떠서 용기를 내서 찾아간 시 낭송 동호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어딘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시 낭송 동호회에는 수상쩍은 아저씨가 모든 시를 음담패설과 연결시켜 주인공이 생각하는 그 아름다운 ‘시’를 더럽히기까지(?) 하고, 뒷풀이에 참석한 한 시인은 절망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라는 불평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전개다. 하지만 윤정희가 말했듯이, 이런 시련들을 통해서 영화는 “노인들에게는 대화가 없다. 친구도 없다. 그래서 외롭다.”*
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더 나아가 타인과 소통을 못하게 만든다. 외로움은 시의 소재될 수 있겠지만, 소통 불가능성은 시를 쓰기 어렵게 만든다.


 더군다나 문제는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고, 이 문제는 보다 결정적이다. 자신과 소통하는 것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그녀의 호기심은 점차 증가하지만 그와 반비례하여 이것을 표현할 언어적 표현력이나 기억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존재가 없어질수록 세상에 대해 더 자주 더 많이 말을 거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어 미자는 답답해하고(그래서 시를 쓰지 못하고), 또 그런 미자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의에서 비롯된 것이든 타의에 따른 것이든 이러한 미자의 고립은 역설적으로 미자를 자살한 소녀인 희진으로 이끌게 한다. 주인공에게 희진의 죽음은 처음에는 그저 병원서 나오는 길에 마주친 우연한 사건에 불과했지만 점차 자신과 밀접한, 가족과 금전 문제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납득할만한 답을 그 누구도 주지 않고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닫거나 무마시킬 생각만 한다. 결국 미자는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섰고, 이 과정은 시를 쓰기 위한 노력과 자연스럽게 합쳐지면서 그녀가 희진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시는 “어른들의 거짓”*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형사의 역할도 한 몫을 한다. 이 '비호감 형사'가 내부 고발 경력으로 좌천됐다는 사실을 미자가 알게되자 그의 진정성을 깨닫고,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비록 미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시는 찾아왔고, 소통의 문제를 겪었던 그녀를 세계와 다시 합일시켜 주었다. 그래서 열린 형식의 결말은 미자는 시를 통해 희진과 동일화 되고 그 거짓을 견디지 못하였지만 그녀와 같은 선택을 취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직접인용한 내용(*)은 모두

고재열,「빵점 시나리오라니? 수우미양가의 수다(윤정희 인터뷰)」, 『시사인』, 143호, 2010. 에서 참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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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을 주제로 한 영화는 많지만, 송강호는 분단과 관련된 영화에 유난히 많이 나온 것 같다. 물론 송강호 본인이 출연한 영화도 많기 때문에 확률 통계상으로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송강호 못지 않게 '분단 영화'(라는 장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에 흔적을 남긴 배우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짧은 영화편력으로는 송강호만큼이나 분단영화와 관련되서 생각나는 배우는 없다. 최근 나온 "의형제"는 "쉬리"와 "JSA"에 이어 세번째인데,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효자동 이발사"도 포함 될 수 있겠다.) 앞선 두 영화와 영화가 상영된 시기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촬영당시의 관점 내지 사회적 분위기가 적지않게 반영된 것 같다.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을때 쯤해서 북한의 대남 테러를 주제로 한 "쉬리"가 나왔고, 남북공동정상회담이 성사된 즈음에 "JSA"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럼 의형제는? 물론 뉴스를 통해서 6.15 남북정상회담과 북한의 핵실험이라는 시대적 상황(그리고 이 두 사건은 영화 전개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이 드러나긴 한다. 하지만 앞의 두 영화들에 비해서는 현실의 어떤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는것 같지는 않다. 송지원(강동원 분)은 북한 정부에 어느 정도 믿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진짜 체제에 대한 신뢰라기 보다는 일종의 '의리'에서 그런 것이고, 이러한 믿음은 이한규(송강호 분)에서는 더더욱 희박하게 드러난다. 국정원에서 방첩활동을 하지만, 업무에 대한 자세와 불평불만은 투철한 대북관이나 국가관, 공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평범한 샐러리맨의 영업활동과 별 다를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은 체제나 사상보다는 북에 남겨둔 가족 때문에, 혹은 "양육비" 때문에 활동하는 '생계형' 인간들이고,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지극히 '자본주의적' 인간들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들에게 국가보다는 가정이 훨씬 더 최우선인 점은 집나간 외국인 여성들을 잡아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이 테러/첩보활동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결국 분단에 대한 시각은 90년대 '불바다'와 2000년대 초반 '우정'을 거쳐서 2010년에는 '무관심'으로 대체된 것은 아닐까 싶다. 남북 정상이 만나든, 북한이 핵실험을 하든 내 가족을 먹여 살리고 함께할 수 있으면 되는 일 아니냐, 하는 생각 말이다. 어쩌면 이 '무관심'을 남북이 모두 갖게 되면 그럼 그 나름대로 또 새로운 국면을 (적어도 영화에서는) 시사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문득 해봤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이나 동향들을 살펴보았을 때 북한은 여전히 관심을 얻고자 부던히 애를 쓰는 것 같아 그 무관심이 일방향적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러다 '쉬리'와 비슷한 영화가 다시 나올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너무 앞서 나간 것 같아 그만두었다.


p.s : "쉬리"와 "JSA" 두 영화을 그때 남북관계의 반영물로 바라본 글을 이전에 봤었다. 영화를 보다가 생각나서 조금 더 연장을 시켜봤던 것이고. 씨네꼼에 활동하던 모씨께서 스누나우에 썼던 글로 기억한다. 대학도 입학하기전에 봤던 글이라, 유감스럽게도 그 이상은 출처를 밝힐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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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한번 잡아보는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한 것도 그렇지만, 그저 웃으면서 보기에는 생각보다 심각한 영화다.
 아님 괜히 나혼자 너무 심각해져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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