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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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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24. 10:37 기억의 습작

 조나라의 문왕은 칼싸움을 어지간히도 좋아했다. 그래서 검을 다루는 식객만 3,000명이 모여들었다. 종일 임금 앞에서 칼싸움을 벌이니 사흘이 멀다 하고 사람이 자빠져 나갔는데, 이렇게 3년 정도가 지나자 나라가 약해졌다. 태자가 걱정이 되어 이렇게 영을 내린다.
 "누구든 임금을 설득해서 검객을 기르는 일을 멈추게 하면 천금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그러자 한 사람이 장자를 추천한다. 장자는 당시에 현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장자는 태자의 말을 듣고는 일단 천금을 논외로 놓고 임금을 설득해보겠노라고 약속을 한다.
 사흘이 걸려 검복이 갖추어지자 장자는 드디어 태자와 함께 임금을 만나러 갔다. 물론 장자는 검술의 달인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장자는 왕이나 대부를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아니다. 어전에서도 잡다한 예는 생략하고 인사도 없이 왕 앞에 나간다.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어떻게 과인을 가르치려고 하오?"
 "왕께서 검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검으로 왕을 뵐까 합니다."
 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왕은 귀가 번쩍 뜨였다.
 "선생의 검은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고?"
 장자는 일단 큰 소리를 친다.
 "제 검은 열 걸음에 한 사람씩 베는데, 천 리를 가도 제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한다.
 "천하무적이로고."
 이제 장자가 검에 대해 한마디를 한다.
 "대저 검술이라는 것은 허점을 보여주어 유인하고, 늦게 뽑아도 먼저 찌르는 것입니다. 한번 시연하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니까 왕은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자기의 검사들이 이 '천하무적'의 검사에게 모두 당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에게 말한다.
 "우선 쉬면서 명을 기다리시오. 시합장을 준비한 뒤에 선생을 부르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검사들을 시합시켜서 7일동안 60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여섯 명을 추려냈다. 그러고는 장자를 불렀다.

 "자, 오늘 검을 시연해주시지요."
 "오랫동안 기다린 바입니다."
 "선생의 검은 길이가 얼마나 되오?"
 "길이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 개의 검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왕께서만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들으신 후에 시험하게 해주십시오."
 "말씀해보시구려."
 "천자의 검과 제후의 검, 그리고 서민의 검 세 가지 입니다."
 "천자의 검은 어떤 것이오?"
 "천자의 검은 연나라의 계곡과 석성을 칼끝으로 하고, 제나라의 태산으로 그 날을 삼는데, 사방의 오랑캐들을 포용하고, 사계절로 감쌌습니다. 이 검은 오행을 다스리고, 형벌과 덕을 논하며, 위로는 구름을 결단 내고, 아래로는 지기를 끊습니다. 이 검을 한 번 쓰면 제후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천하가 복종하게 됩니다."
 
문왕은 그 거침없는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서 제후의 칼은 무엇인지 묻는다.
 "제후의 칼은 용기 있는 자로 칼끝을 삼고, 청렴한 사람으로 칼날을 삼아서, 위로는 둥근 하늘을 본받아 해와 달과 별의 세 가지 빛에 순응하고, 아래로는 모가 난 땅을 본받아 사계절에 순응하고, 가운데로는 백성들의 뜻에 부합하여 사방을 편안하게 합니다. 이 칼을 쓰면 나라 안에 그 명령을 어기는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이제 문왕은 점점 수치를 느낀다.
 "서민의 칼을 말해보오."
 "서민의 칼은 봉두난발에 귀밑머리가 관(모자) 밖으로 나오고, 눈을 부릅뜨고 면전에서 서로 치고 받는데, 위로는 목을 베고, 아래로는 간과 폐를 찌릅니다. 이것은 닭싸움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단 목숨을 잃고 나면 이미 나랏일에 쓸 수가 없게 되지요. 지금 대왕께서는 천자와 같은 지위에 있으면서 오히려 서민의 칼을 좋아하시니, 제가 감히 말씀드리오니 그 일은 경박한 행동이라 여깁니다."

 이러자 문왕은 크게 깨달아 장자에게 술을 올린다. 그러자 장자는 말한다.
 "대왕께서는 좌정하시고 심기를 바르게 하십시오. 검에 관한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동안 문왕은 궁전을 나가지 않았고 검객들은 모두 자결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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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운영 방침과 같은 큰 결단은 명분과 실재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데, 명분을 잃으면 실재까지 잃는다. 조나라 문왕은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명분을 잃었다. 문왕의 뛰어난 검객들은 문왕이 명분을 잃은 것이 밝혀지자 모두 자결하고 만다. 문왕의 잘못된 결정이 결국 아까운 생명들만 죽인 것이다.
 최고결정권자의 결단은 객관적인 관찰에 명분이 더해져야 하고, 거기다가 반드시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아래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결단은 한번 내리면 주워 담지 못한다. (...) 결단하는 일은 그래서 항상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긴장감이 없어지면 힘이 흩어진다. (...) 천자의 검, 제후의 검을 쓰는 것이 쉽지 않듯이 오늘날의 중요한 결단도 마찬가지다. 최고결정권자는 천자의 검을 쓰듯이 신중하게 명분과 책임에 근거해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박찬철, 공원국,  『귀곡자: 귀신 같은 고수의 승리 비결』, 위즈덤하우스, 2008, pp. 266-269.

   .... 근데 우리의 가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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