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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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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6. 00:52 기억의 습작

빨래3

 

 정신이 얼얼하게

 아니 온몸이 얼얼하게

 누군가 나를 물 속에 처넣고

 빡빡 비벼댔으면 좋겠다

 옛날식으로 나무 방망이로 퍽퍽

 두들겨 준다면 더욱 좋겠다

 혼, 비, 백, 산

 알량한 자의식일랑 거품으로 터져버리고

 주장할 색깔도, 모양도

 형편없이 무너져내리고 싶다

 땟국물 한 방울 남지 않게

 단단히 비틀어 짜다오

 정신이 번쩍 나게

 맑은 물에 여러번 헹궈다오

 솔기 속에 숨은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도록

 탈탈 털어다오

 물먹어 무거워진 몸

 빨랫줄에 널브러지면

 아무 생각 없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비바람에 몸을 맡기겠다

 햇볕을 잔뜩 포식해

 햇살이 구운 바삭한 과자같이 되겠다

 무수한 잔금들 위에

 시원한 물이 뿜어지고

 뜨겁게 달구어진 육중한 쇳덩이가

 주름을 펴주면

 그렇게 뼛속까지 개운한 단련도 없으리라

 깃을 단정히 여미고

 두 팔을 개켜 반듯이 접은 몸 위에 모아다오

 다시 또 걸어나가

 먼지 속에 엎어질 몸이지만

 빈틈없이 나 자신에 쪼개어져

 정화된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게 해다오

 이 보송한 고요를 방해하지 말아다오

 

         이윤림, 생일, 문학동네, 2000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