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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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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6. 06:32 기억의 습작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 벗어나기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따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p. 68, 잘 표현된 불행


시가 지향하는 바의 순수언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억압된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현실에 닿기 위해 어떤 길도 가로막지 않은 언어이다. 사실, 말이 사물을 유연하면서도 명확하고 깨끗하게 지시하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순수 언어에 대한 소망은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언어에 이른다. 그러나 이 부정은 사물의 깊은 속내를 말로 다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현실 속에 '숨은 신들'이(다시 말해 타자들이) 저마다 제 말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말하고 다시 고쳐 발하려는 노력와 그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부정의 언어, 다시 말해 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는 언어이다. 모든 주체가 타자가 되고, 그 모든 타자가 또다시 주체가 된다고 믿는 희망이 이 언어의 기획 속에 들어 있다. 시의 길이 거기 있다기보다는 시가 그 길을 믿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pp. 74-75, 불모의 현실과 너그러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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