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Gruentaler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12. 6. 12. 15:25 기억의 습작

 (아도르노의 말에 따르면 문화풍경(Kulturlandschaft)은)땅 위에 각인된 역사.. 그것이 우리를 진실하게 하는 풍경이라는 것이다.역사의 흐림이 정지된 폐허는 화석화한, 근사한 문화풍경이다. "폐허의 필요성"이라는 책을 통해 고전적 푸역ㅇ의 의미를 현대에서 더욱 확장한 잭슨의 말은 문화풍경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그가 쓰길, "폐허는 복원을 위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며 또 원형으로 복귀하게도 한다. 낡은 질서는 새롭게 탄생되는 풍경을 위해 사라져야 한다. ... 역사는 존재하기 위해 중단되는 것이다."(p. 71)


 건축가 민현식은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해 온 정치적 권력, 종교의 힘 또는 무형의 권력인 자본의 위력들이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조물들은 이제 새 시대에는 사라져 주어야 한다"고 했으며, "땅의 조건에서 도출된 형상이 하나의 인자가 되어 주변과 합일된 풍경을 이루는 것, 인간과 자연에 대한 윤리, 이러한 정신은 바로 변화, 전체보다는 개체의 정체성, 일상의 회복을 속성으로 하는 새 천년의 시대, 다중심 다원화의 시대적 가치로 고양되어야 한다. 그래서 천지인을 하나로 인식하여 자연과 합일하려 했던 우리의 전통정신이 오늘에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p. 74)


 모든 땅에는 과거의 기억이 손금과 지문처럼 남아 있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지문(指紋)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무늬(地紋)을 가지고 있다. 더러는 자연의 세월이 만든 무늬이며, 더러는 그 위에 우리의 삶이 연속적으로 새긴 무늬이다. 이는 우리가 땅에 쓴 우리 삶의 기록이며 이야기이다. 따라서 땅은 장대하고 존엄한 역사서이며, 그래서 위하고도 귀하다. 이를 지문(地紋, landscape)이라고 하자. (p. 79)


 건축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운 자의 영광을 만세에 기리기 위해 기념비적 건축이 세워졌어도, 혹은 가진 자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기술적 성취를 이루며 하늘 높이 솟았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겆축도 결국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낼 수 없다. 남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기억뿐이다. 그것만이 구체적 진실이 된다. (p. 80) 


 이 장소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원래의 땅이 지녀왔던 고유함에 대한 발견이다. 여기에 새로운 소망이 더해져 특별함을 만들고, 결국 여기를 지나는 시간과 사연들이, 이 장소의 풍경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우리들의 선한 기억을 만든다. 건축은 공간으로 구축되지만, 시간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p. 129)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