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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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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8 히틀러와 뮌헨1
2008. 7. 28. 14:59 서양사 관련

히틀러와 뮌헨

 

뮌헨을 보지 않았다면 독일의 예술을 알 수 없다.

-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중에서

 

Ⅰ. 들어가며

 

 <나의 투쟁>에 따르면 히틀러 자신은 1912년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사는 바빌론의 도시’인 빈에서 ‘독일 예술의 수도’인 뮌헨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한 뒤에도 히틀러는 이 시기부터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의 뮌헨에서의 삶을 그가 건축예술가로서 많은 교양과 기회를 쌓을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던’ 시기였다고 종종 회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미화된 ‘회상’과는 달리 실제로는 (군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합스부르크가’의 군인이 되는 것이 싫어서 1913년에 뮌헨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뮌헨에서의 생활 역시 실제로는 그림엽서를 그려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이따금 가는 술집에서도 말없이 한두 잔 마시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음울한 실직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과 회상이 다르다 할지라도 뮌헨이라는 지리적 공간이 그에게 예술가 지망생이자 정치가로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Ⅱ.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히틀러와 뮌헨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는 뮌헨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선전가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독일의 대부분 지역이 그러했지만 이 무렵의 뮌헨은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고 있었다. 종전 직전에 사민당(SPD)의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는 기존의 지배가문이었던 비텔스바하 가문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다음해인 1919년 2월에 보수 반동세력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 여파로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이는 5월에 국방군과 민병대에 의해 잔혹하게 무력으로 해체되었으나 좌우익의 갈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좌파가 우세한 수도 베를린과 그에 비해 보수적인 뮌헨 사이의 일종의 지정학적인 갈등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같은 경제적인 위기가 더해지면서 히틀러와 같은 극우파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1923년 히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루덴도르프 장군Erich von Ludendorff이나 뮌헨의 경찰청장 카Gustav von Kahr등과 함께 쿠데타를 기도하였으나 본인도 총상을 입는 실패로 끝났다. 쿠데타에 대한 공판에서 그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변호를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를 고소한 검찰도 핑계를 대고 고소를 거부하였다) 결국 내란죄 중 최소실형인 5년 형을 언도 받고 투옥되었다. 하지만 다시는 무력으로 쿠데타를 기도하지 않고 합법적인 정치활동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1년 만에 사면되었다. 이를 통해 비록 쿠데타는 실패하였으나 히틀러는 바이에른을 넘어서서 독일 각지에서 지지여론을 형성시켜 나갈 수 있었고, 이러한 그를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기관지인 『민족 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는 ‘뮌헨에서 가장 인기 있고 동시에 가장 미움을 받는 남자’로 표현하였다.

 히틀러와 그의 당인 NSDAP는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를 등에 업고 꾸준히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친위대인 SS(Schutzstaffel)를 비롯하여 연달아 히틀러 유겐트, 민족사회주의 독일 법조인 연맹, 의사연맹, 교사연맹, 부인 연맹과 같은 조직을 창설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시의회, 주 의회, 제국의회선거에서는 점점 더 많은 지지율을 확보했다.

 1919년 전쟁이 끝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무렵 뮌헨의 시의회는 사민당이 제 1당으로서 시정을 주도하였으나 24년부터는 보수정당인 바이에른 민족주의당(BVP)이 제 1당이 되었고, 33년 3월에는 마침내 NSDAP가 시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같은 해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 사민당을 비롯한 좌익 정당들은 5월 ‘볼셰비키 정당’으로 몰려 탄압을 받은 끝에 해산되고 바이에른 민족주의당과 같은 우익 정당들은 11월에 자체적으로 정당 활동을 중지하였다. 또한 같은 해 당시 뮌헨의 경찰청장이었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와 SS의 주도하에 뮌헨 근교의 다카우의 군수공장 터에 집단수용소를 건설하여 정치범과 동성애자 등을 수용하여 강제노역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Ⅲ. 히틀러의 권력 장악 - 나치즘 운동과 독일 예술의 수도로

 

 총통Führer이 된 히틀러는 1935년 뮌헨을 ‘(나치즘) 운동의 수도Hauptstadt der Bewegung’으로 뮌헨을 명명하였고, 이 차원에서 도시정비 계획을 수립한다. 오늘날 미술관들이 집결한 쾨니히스플라츠Königsplatz를 중심으로 <영도자관Führerbau>과 NSADAP 당사(오늘날 음악대학 건물)를 신축하고 도심에 민족사회주의 예술 포럼NS-Kultur Forum, 독일 예술관Haus der Deutschen Kunst, 독일 사법관Haus des Deutschen Rechts, 신 중앙역(동시에 오늘날 그대로 있는 ‘구’ 중앙역 자리에는 200미터에 달하는 민족사회주의 운동 기념 오벨리스크를 만들고자 하였다), 히틀러 영묘Mausoleum für Hittler과 같은 대규모 건물들을 지어 기념하고 민족사회주의의 고향임을 천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대부분은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동시에 히틀러는 뮌헨을 ‘독일 예술의 수도Hauptstadt der deutschen Kunst’로 삼고자 하였다.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자 유럽에서 유통되는 예술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고,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본격적으로 점령국의 예술작품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는 린츠에 건설하기로 한 게르만 국립 박물관에 소장하여 전시하기 위해서였는데, 완공하기 전까지 뮌헨에 보관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소장된 예술 작품들은 유럽의 전시대를 망라한 걸작들이 3,000여 점 이상이 수집되었다고 하며 뮌헨에 보관할 장소가 부족해지자 노인슈반스타인 성과 같은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히틀러는 실제로 뮌헨에 들를 때마다 이 예술작품들을 구경하고 이러한 예술작품들을 소장할 미술관들을 직접 설계할 정도로 이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독일 예술의 수도’에 위치한 ‘독일 예술관’에 히틀러는 민족사회주의의 이상에 맞는 ‘독일 예술’작품을 전시하고자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독일 예술’은 이상적인 신체,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나 영웅적인 건축물, 용맹한 군인상이었으며, 이에 반대되는 예술작품, 특히 모더니즘과 같은 예술작품들을 ‘타락한 예술Entartete Kunst’로 간주하여 일종의 본보기로 따로 모아 순회 전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를린에서와 마찬가지로 1933년에는 민족사회주의 계열의 독일 대학생 연합의 주도로 쾨니히스플라츠에서 맑스주의, 평화주의와 관련된 책이나 유태계 인사들이 쓴 책들을 모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정치의 예술화’과정은 히틀러의 권력 장악과 함께 가속화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뮌헨에 거주하는 유태인은 전체 시민의 2%에 불과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다른 지역의 유태인에 비해 덜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1만 2천명의 뮌헨의 유태인 중 7천 5백 명이 탄압을 피해 망명을 하였고 종전 후까지 도시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은 단 7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뮌헨의 유태인들은 1933년부터 공공 영역에서 ‘배제Ausschaltung’되기 시작했고, 35년 뉘른베르크 법 통과 이후 이러한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38년 10월에는 여권 등의 신분증에 ‘J’표기가 의무화되었으며, 뮌헨 중앙 시나고그는 파괴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같은 해 11월 제국수정의 밤에 정점에 달하게 되었다.

 

Ⅳ. 저항

 

 그렇다면 히틀러의 권력 장악, 1당 독재화가 진행되어가면서 시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의 급변과 사상과 언론의 자유의 제한, 게슈타포의 등장에 대해 ‘볼셰비즘’을 차단하고 미래의 체제의 자유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비판적이고 거리를 두는 자세를 유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보다 더 적극적인 거부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적절한 견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결국 놓치고 말았다.

 1920년대 말 바이마르 공화국이 영안(案)이나 도즈안 등을 통해서 배상금이 경감되고 인플레이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정치적으로도 안정 상태가 되면서 ‘황금의 20년대’를 맞게 된다. 당시 뮌헨에는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Oskar Maria Graf, 리온 포이트방어Lion Feuchtwanger, 만Heinrich, Thomas Mann형제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등이 활발히 문학, 예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히틀러와 NSDAP에 대해 작품 등을 통해 비판을 하였다. 하지만 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되면서 더 이상 공공연한 비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스위스나 덴마크와 같은 중립국들로 망명을 떠난다.

 비록 민족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여도 침묵함으로써 순응하였으나, 저항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9년 11월 23일 16년 전에 있었던 히틀러 쿠데타 기도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게오르크 엘저Georg Elser는 히틀러가 쿠데타를 선동하였던 맥주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폭탄을 터트렸으나 히틀러가 제시간보다 일찍 자리를 뜨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1943년에는 뮌헨 대학교의 학생들의 저항조직인 백장미가 대학교에서 반체제적인 글을 뿌리다가 체포되었고, 관련자인 한스, 소피 숄 남매Hans, Sophie Scholl,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와 이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쿠르트 후버 교수 Kurt Huber 등이 처형되었다. 이밖에도 한때 서품 25주년을 기념하여 히틀러로부터 직접 축하를 받기도 하였던 예수회 신부 루퍼트 마이어Lupert Mayer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강압적인 체포와 탄압 방법에 대해 비판적인 설교를 하다 결국 체포되어 다카우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은 좌파에서부터 구 보수 왕당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일어났다.

 

Ⅴ. 제 2차 세계대전의 공습과 종전 이후의 뮌헨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스탈린그라드의 공방전의 실패로 끝나면서 전쟁은 독일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뮌헨은 42년에서 45년에 걸쳐 영국 공군과 미 공군에 의해 공중 폭격을 당했고 여기에 약 2천 톤의 폭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주요 전기, 군사, 교통 시설을 비롯하여 8만 2천 가구와 구 시가지의 90%, 전체 시가지의 50%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인명 손실도 막심하여 이 기간 중 6천명의 사망자와 1만 5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도시 인구는 전쟁 전 82만 명에서 47만 명으로 급감하였다. 결국 45년 4월 30일 미 7군이 뮌헨에 진입하면서 미 육군 대령인 유진 켈러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었고, 나치의 바이에른 지역에 대한 지배는 종식되었다.

 종전 후에도 지역 특유의 보수적인 분위기나 종전 직후에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에 의해 이루어졌던 타인에 의한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불만, 그리고 ‘나치즘 운동의 수도’로서 히틀러에 대한 향수는 뮌헨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68혁명 이후 본격적인 과거사 청산 작업이 착수되고 민족사회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의 다른 지역들은 히틀러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반면 뮌헨을 비롯한 바이에른 지역은 오히려 아직도 터부시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다카우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을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로 기억하기 위한 기념화 작업을 착수하였으며, 현대사 연구소를 비롯하여 나치 문서보관소 등을 설립하여 운영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청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Bauer, Richard. Geschichte Münchens :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 München : C. H. Beck, 2005.

Large, David Clay. Hitlers München : Aufstieg und Fall der Hauptstadt der Bewegung, München : C. H. Beck, 1998.

피터 게이, 바이마르 문화, 조한욱 역, 탐구당, 198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에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하랄드 슈테판, 아돌프 히틀러, 최경은 역, 한길사, 1997.

요아힘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안인히 역, 푸른숲, 1998.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이명성 역, 홍신문화사, 2006.

안병직 외, 세계의 과거사 청산, 푸른역사, 2005.

 

 

* 사실 뮌헨에서 주어들은 이야기로, 즉 '카더라 통신'도 좀 있음을 여기서 밝힘.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블로그에도 그대로 같은날 동시에 올리는 바임. 따라서 네이버의 구보씨의 글을 티스토리의 구보씨가 자기것인양 베꼈다던가, 자기 표절 그런건 결코 아닐....듯??

* (또 추가) 일부 문장에 대해서는 위의 참고문헌을 인용하기도 하였음. 주석이 달린 채로 한글에서 작성하여 긁어 왔는데, 주석은 안딸려와서....

posted by Gruenta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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