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Gruentaler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08. 12. 10. 13:28 (독)문학 관련/서평들

그 남자가 악어 뱃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 도스토예프스키,『악어 : 이상한 사건, 혹은 아케이드에서의 돌발적 사건』(박혜경 역, 열린책들, 2007.)

 
 어느 날 시내의 아케이드에서 전시 중이던 악어 한 마리가 이를 구경하러 온 한 사람을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먹어 버렸다 라기 보다는 그냥 한입에 꿀꺽 삼켜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악어에 잡아먹혀 완전히 소화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고무풍선과 같이 텅 빈 악어의 뱃속에서 살아남아 편안히 누워 있다. 그리고 이사람을 이야기의 화자인 세묜 세묘니치와 희생자의 부인인 엘레나 이바노브나는 어떻게 해서든 끄집어내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악어 주인은 악어가 구경거리로서의 상품가치가 높아진 것을 눈치 채고 날이 갈수록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들을 요구하면서 완강한 자세를 취한다. 세묜이 도움을 청하러 간 늙은 관리 역시 이 사태에 대해서 희생자인 이반 마뜨베이치를 적극적으로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가 이성이나 진보를 너무 맹신하는 자세가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다고 탓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에서 건너온 그 악어가 외자유치에 도움이 된다며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보고 있으며, 미망인(?)에 대해 음흉한 생각도 거리낌 없이 말한다. 사태가 더더욱 우습게 진행되는 것은 이 악어 뱃속에 갇힌 이반 역시 오히려 악어 뱃속이 ‘고무 냄새가 심히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공간이며, 자신이 그 곳에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경제적, 사회적인 이득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완벽한 공간’에 주인공과 자신의 부인을 초대하기까지 한다. 악어 뱃속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용모를 한 엘레나는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한편 이반과의 이혼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를 바라보는 세묜은 부인의 ‘외도’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묻기보다는 오히려 질투심을 갖는 등 은연중에 관심을 표명한다. 소설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나기 때문에, 결국에 이러한 ‘경제원리’등과 같은 이성적 사고가 악어 뱃속의 한 남자를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게 될지, 아니면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그가 계속 악어 뱃속에 머물게 될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작가의 머릿속에, 그리고 독자의 판단에 달리게 됐다.


 악어가 사람을 집어 삼켰다는 비극적인 사건은, 결국 이렇게 희극적으로 진행된다. 무엇이 이 사건을 희화시켰는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인 논리나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하기 전에 이미 주인공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불쾌했겠지만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호기심을 유발’했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희화되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 과정은 모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특히 경제적인 원리를 통해 바라보았을 때 틀린 점은 없다는 점이 이야기를 어이없게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이해관계가 다 다르고 얽힌 것처럼 보여도 이러한 논리에 따라 비정상적인 상황의 현상 유지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합쳐져 일단락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돈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돈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끝까지 웃기다. (‘열린 결말’에서 ‘끝’이라니? 이 표현마저도 우습다.)


 이제 각 등장인물들이 아닌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자. 일단 사건이 발생한 곳은 아케이드였고, 유럽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데리고 온 악어에 의해서 발생했으며, 그 악어 뱃속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다. 아케이드는 벤야민 등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인 대도시 형성 과정에 있어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공간이다. 또한 소설의 배경인 1865년 당시 독일은 아직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주요 영방국가들은 후진적인 사회를 발전시켜야 하는 러시아에 있어서는 하나의 룰 모델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 대륙의 선진적인 모습을 직접 가서 보며 배우고 싶었던 이반 마뜨베이치는 바로 그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인 아케이드의 한 전시실에서, 그가 그토록 직접 경험하고자 했던 선진적인 유럽 본토에서 운반된 악어의 뱃속에 갇히게 된다. 이쯤 되면 악어의 뱃속이 그를 소화시킬 내장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가 삼켜진 것이 아니라 먹혔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 불만을 품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러시아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연구하고 이를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물론 위정자들에게까지 가르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갖는다. 이렇게 비록 그는 악어에게 먹힌 탓에 가고 싶었던 유럽에는 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중첩되고 ‘완벽한’ 공간 속에 갇혀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소원을 성취했다고 그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물 간의 이해관계나 이성적인 판단의 엇갈림 속에서도 그 나름의 이성적인 논리들에 따라 하나의 결론으로 서서히 합쳐져 가는 모습과 폐쇄적인 공간들에 여러 겹으로 갇혀버린 것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랜 시간동안 러시아 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러시아적인 전통 가치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서구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바꿔 나아갈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자의 입장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특히 이것이 경제적인 논리와 결합했을 때 어떠한 몰인간적인 처사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이를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가 후자의 의견을 전통의 기준과 관점을 갖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이 문제는 러시아만의 특수한 ‘전통’은 아니다. 이러한 고민은 서유럽식의 근대화(사실 이렇게 표현하기에도 서유럽의 각 국가들의 근대화에는 자신들의 특수성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리가 있지만)가 유일한 길도 아니고 정답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최소한 현상유지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따라가야만 하는 ‘주변부’에 위치한 사회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일각에서는 보수적이고, 유태인이나 투르크와 같은 무슬림권 사회에 대해서 상당한 인종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작품이 고전으로서 큰 호소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우리도 주변부에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혜경, 「역자해설 - 악어 : 급진주의에 대한 삐딱한 시선」, 『노름꾼 외』, (심성보 외 역), 열린책들, 2007, pp. 487-489를 참고함.

==========
과제 제출용 서평이다. 선생님이 사실상 '인터넷에서 대충 긁어와도 찔리는게 있으면 방학때 여유있게 읽어보시라'라고 말했으니 성적평가에는 말그대로 발로 써도 큰 영향은 없을 듯 하다.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제출했다'로만 평가에 반영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썼다.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