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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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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29. 22:52 기억의 습작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가였던 윤공흠(1904~?)에 대해 다음 백과사전위키피디아 한국어 사이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8·15해방이 되자 귀국했으며,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2년 11월 내각 재정상, 1954년 3월 상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조선노동당 8월 전원회의 당시 '8월 종파'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회의직후 서휘·이필규 등과 함께 당중앙위원직과 당적이 박탈되었으나 소련 등 외세의 간섭으로 곧이어 열린 9월 전원회의에서 당적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공흠(1904~?)은 일제 강점기 때 화북조선독립동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이자 북조선의 정치인이다.[1] 1956년 8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당시 8월 종파사건을 일으킨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김두봉최창익무정 등에 의해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하여, 의 일원으로 활동했다.[1]

1945년 8·15해방이 되자 귀국했으며,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내각이 성립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52년 11월 내각 재정상에 임명되고.[1]1954년 3월 내각 상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1]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했다.[1] 회의직후 그는 서휘이필규 등과 함께 조선노동당 당중앙위원직과 당적이 박탈되었으나, 소련 등 외부의 간섭으로 곧이어 열린 동년 9월의 북조선 전원회의에서 당적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1]


윤공흠과 관련하여 최근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동독-북한 외교문서 관련 사료 정리 및 해제 작업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했는데, 1962년 주 북한 동독 대사인 슈나이데빈트는 주 북한 체코 대사인 코후섹(Kohousek)으로부터 "1956년 당에서 축출된 후 중국으로 이주한 전 조선노동장 중앙위원회 위원이 중국 정부에 의해 북한 첩보기관으로 넘겨졌다"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동독 외무성에 보고를 하였다. (베를린 연방문서고 소재 Bestand DY 30, Band 3646) 누구라고 정확하게 써있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윤공흠을 말하는듯....하다는 사실을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것은 아닐까...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자랑삼아 올려봅니다. (위키백과에 언급된 이와 관련한 내용은 본인이 추가한 것임)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