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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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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1. 21:31 생활의 발견

 오고 싶지 않았던 과사무실에 왔더니 학사편입을 지원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자세한 사항은 이야기 할 수도, 해서도 안되겠지만, 자기 소개서에는 "우리과 모 선생님의 모 책을 읽고 자신의 무지를 깨우쳤으며 편입해서 지도편달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내가 아는 한, 결코 인문대의 마인드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어마어마한 포트폴리오까지 첨부해서 보내왔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그런 "자기 경력"을 가지고 굳이 우리과 와서 공부를 하고 싶다면 편입이 아니라 대학원 와서 공부하는게 훨씬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어딘가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어마어마한 자기 소개서와 포트폴리오에 있었던 상당한 "정치성"이었는데, 모 선생님의 모 책을 언급할 때부터 눈치챘지만 어딘가 상당한 보수적인 느낌이 나를 불편하게 했고, 두번째로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과도한" 자기소개가 유명 수도권 대학의 서울 캠퍼스가 아니라 지방 캠퍼스 출신(복수전공은 서울에서 했다)이라는 사실과 겹쳐지면서였다. 

 솔직히 나의 정치적 성향을 물어본다면 "알고보면 그렇게 진보적이지는 않다" -- 솔직히 "자유주의"에 가깝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놈의 나라는 유사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이름을 더럽혀서 욕먹이는 공간이니까 --- 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친근할 법(?)도 한 "보수적"이라는 것에 단순한 반대의 감정 이상을 넘어선 불편함을 느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네들 만큼이나 내가 제법 말이 안통하는 종자라 그런 것일수도 있겠다.

 두번째는 사실 조금 이야기하기가 약간 조심스럽다. 물론 나는 나 하나 먹고살기 바쁜 마당에 다른 사람의 학력에는 별 신경쓰지 않는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의식의 어딘가에는 보고 배운게 각인이 되어 있어서, 이럴 때 그런게 나올지도 모른다고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 과도한 자기소개와 소위 말하는 "스펙" 너머로는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것 이상이나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이 보였다. (다른 얘기지만, 역시 편입한 내가 아는 사람 한 명도, 편입한 학교에 대해 상당히 강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아 불편해하기도 했었다.) 아니, 사실은 "스펙"이 그 어떤 것보다 대학생활의 중요한 경험이자 자산이고, 자소서가 소위 "자소설"이 되어가는 마당에 이 정도는 양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말을 이래저래 돌려말했다. 하지만 결론은 내가 어디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일까? 단순히 관련 자료들의 "과도성" 때문일까? 아니면 그 과도함의 이면에는 정말 이런 말 블로그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마당에서 하기는 그런 말이지만, 속된 말로 말하는 "학력세탁"이 있는걸까? 아니면 나 또한 나도 모르게 갖게된 학력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감추고 저런 생각으로 내 불편함을 감춰둘려고, 혹은 정당화시킬려고 하는 것에서 온 불편함일까? 여러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여러개일 수도, 아니면 'none of these'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실 어떤 의미로든 이런저런 생각을 한 내가 왠지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니, 참 이래저래 부끄러운 일 투성이로구나.

p. s. : 우리과 모 선생님의 모 책을 읽고 자신의 무지를 깨우쳤으며 편입해서 지도편달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은 헀는데, 정작 그 분은 이 글을 볼까? 나는 볼 것 같지 않다. 본다 하더라도 잠깐 기분 우쭐해지고, 그게 다겠지.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