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결혼하는 H선배는 독문과 교양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이다. 혼자 듣는 수업에서 무작정 아무 조에 꼈는데 알고보니 과/반 모 선배의 대학신문사 후배였고, 그 선배의 험담아닌 험담(?)으로 급친해졌던 것 같기도하고. 사실 그 수업에서 끝날만한 인연이었을 법한데도 계속 연락이 됐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독일어 선생님이시고 독문학도 좋아해서 독문과 대학원도 잠깐 생각해본다고 했지만, 언어의 한계 때문에 단념했다고 했었다(사실 나는 그 '언어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그 교양 수업을 들었던 그 선생님 때문에 속으로는 잘 생각했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사실 연락을 계속했다고는 하지만, 군입대 이후로 서로 학교에 있는 기간이 달랐기 때문에 그 뒤로 직접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싸이월드가 전부였고, 그러다 보자, 보자 서로 말 그대로 노래만 부르다 두달 전에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헤어질려고 자리를 일어설 때쯤 우스개소리로 '아버지 연세가 연세다 보니 걱정 좀 덜어드릴려고'라며 3월에 결혼한다고 그랬다. 농담이었지만 어깨 너머로 꽤 오래 사귀었던걸로 알고 있는데, 당연한 수순일게다.
얼마 뒤 청첩장을 받을 주소를 가르쳐주고, 또 얼마 뒤 청첩장을 받았다. 청첩장 안에는 또 작은 청첩장이 들어있었고, 여자든 남자든 같이 올 사람이 있으면(단 한명이 있는데, 위에서 말했던 험담의 대상이었던 그 선배 뿐이다.) 같이 오라는, 결코 친절하지만은 않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두달 전에 만나서 '신랑/신부측 커플-솔로 스티커 붙여서 알아서 좋은 인연들 만들어 가라는 이벤트를 생각중이다'라는 얘기는 이에 비하면 말 그대로 덕담이었다. 청첩장 블로그를 만든 것도 부족해 이틀 전에 문자까지 받았으니, 이정도면 발병이 나더라도 가야 할 듯하다.
남의 결혼 이야기는 이쯤 하고, 꼭 굳이 부모님 한말씀이 아니더라도 아직 서른은 안됐을 지라도 20대 후반이 된 마당에 결혼은 아직 나의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완전히 남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된 것은 실감하고 있다. 최근까지는 '뭐, 그래, 하면 좋고 못하면 할 수 없는거지'했다가 어느 순간에 '안하면 정말 뭔가 찌질해질것 같다'라는 강박관념(?)으로까지 바뀌어 '하고 싶다'와 '해야 한다'가 묘하게 뒤 섞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 '내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처음에는 그저 아직 무수입의 궁핍하지 않은 시대의 궁핍한 학생이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책임감' 때문이려니 했었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내가 누군가와 함께 진심으로 좋아해서 앞으로 살아온 날 그 이상으로 항상 같이 있고 싶어할 수 있을까하는 내 자신의 진정성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결국에는 '내가 매사에 과연 얼마만큼 진지하기나 했나'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뭐가 알 수 없는 회의감까지 들었는데, 한편으로는 이 걱정 또한 나만의 문제가 아니길 하는, 모처럼 진지해졌다 다시 무책임해지는 생각으로 매듭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매듭을 지어서 안될 일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정말정말 좋아서, 혹은 그저 아버지 걱정 덜어들이려고 그런건지, 아니면 모 웹툰에 나온대로 '이 만큼 오래 사귀었는데 포기하면 아까워서'그런 것인지까지 알지도 못하고, 이 블로그를 찾아 올일도 없겠지만, 모쪼록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 "좋아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다는,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희망사항"을 지속시키길 말이다."(법정, 함께 있고 싶어서) 아, 물론 이 말은 과연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