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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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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16:13 서양사 관련

 논문 수정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관련한 한국어 책 두 권을 살펴보았는데,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당연할 법도 하고, 나중에 나온 책이 분명히 앞서 나온 책을 참고문헌에 기재했으니 별 문제는 없을듯도 하지만(두 책다 별도의 각주는 없음) 유사한 구절들이 보이는듯....해서 여기다 옮겨 적으니까 별로 같아보이는 것 같지도 않고... 처음 읽을 때 내가 너무 예민했나?


1.

비스마르크는 처음에 젊은 빌헬름을 높게 평가했지만, 비교적 일찍 황태자의 정치적 소양이 부족함을 탄식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외무부에서 일시적으로 일하게 함으로써 국가활동을 통찰하는 능력을 심어주려고 했다. 그 당시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비스마르크의 이런 생각에 반대했으며, 빌헬름의 '미성숙'과 '불손함'에 대해 언급했다. (몸젠, 최경은 역, "비스마르크", p. 184)


 그러나 젊은 황제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아버지보다 낫다고 여겼던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부족한 정치적 소양과 인격적 장애에 대해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일찍이 비스마르크가 훗날 국가의 통치자로서의 통찰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왕자를 포츠담 정부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당분간 외무부에서 경험을 쌓도록 자시를 만들고자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황태자이던 프리드리히 3세는 오히려 때가 이르고 맞지도 않다고 생각했는지 그러한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혹자들은 그때부터 벌써 아들 빌헬름의 미성숙하고 불손한 기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강미현, "비스마르크 평전: 비스마르크, 또다시 살아나다", p. 622)


2.

 이 회고록("상념과 회고") 집필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옛 부하 로타르 부허였다. 그는 자료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구술하도록 유도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를 대충 서술하는 경향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구술은 그를 피곤하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야기를 상당히 건너뛰거나 혹은 순서를 바꾸어 구술하기도 했으며, 남의 조언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회고록은 1892년에 완결되었으며, 호르스트 콜이 비스마르크 사후에 이것을 출판하였다. 2권으로 되어 있는 1편은 비스마르크 사후에 즉시 출판되었다. 그의 해임을 다룬 3편은 비스마르크의 희망에 따라 빌헬름 2세가 죽은 후에 출간되었다. 철저한 군주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마지막 황제를 비판하면서도 때때로 군주인 빌헬름 황제가 대중들로부터 탄핵받는 것을 근심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3-205)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두 사람은 의견 차이로 심심찮게 어려움을 겪었다. 비스마르크는 역사적인 서술에 있어 상세한 면이 부족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건너뛰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설명하는 중에 서로 연관이 없는 부분이 생길 때마다 부허의 남다른 노력이 절실했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당대인들을 가급적 관대하게 다루고, 심지어 문제점은 빼기를 바라는가 하면 유산을 비롯한 자신의 문제는 애써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처럼 역사를 도구화하는 부분이나 독일 문제와 관련해서 노재상의 고집을 조율하느라 부허는 힘겨워했다. (강미현, 669)


3.

 노년기에 행했던 수많은 발언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항상 겸손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1893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허영심은 인간의 능력을 근거로 하는 담보물이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내적 자산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보려면 우선 허영심을 없애야 한다."

 비스마르크는 허영심이 전혀 없었다. 그는 노년기에도 자신의 부족함이나 대학생 때의 부족한 학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할 경우, 그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에도 불구하고 '군주적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대부분 단순하고 온화하게 발언했다. (몸젠, 최경은 역, 208)


 그러나 전반적으로 삶에 대한 그의 자세는 신에 의지하며 인간의 참된 내면을 강조하는 쪽이었다. 1893년 "자만으로 지탱되는 능력따위는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에서도 나타나듯이, 비스마르크는 만남에 있어서 항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재임 기간에는 비록 독재적인 지도자였지만 그야말로 자만심이나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심지어 게을렀던 대학 시절 이야기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열광하는 대중 앞에서 보이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태도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강미현, 691)



posted by Gruent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