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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발길을 멈추고 주저앉고 말면 우리 삶은 거기서 끝나게 됨이라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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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상의 미국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을 다룬 드라마 《더 웨스트 윙The West Wing》(1999~2006 방영)의 다섯 번째 시즌(2003~2004 방영)은 재선에 성공한 해와 그 다음해 까지를 다룬다. 전체 8년 임기 사이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이 기간은 처음 당선했을 때보다 행정부가 자신의 아젠다를 보다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초반 4년은 집권 2년차에 실시하는 중간선거와 재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집권 2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정권 재창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에 이르면 임기 첫해만큼의 참신함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초선 때보다 더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대통령이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기 이전부터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석참모진 대다수에게조차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 행정부는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격렬한 도덕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은 이 문제를 극복하였고, 지난 4년 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하여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보다 확실하게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다섯 번째 시즌은 다른 어느 시즌들보다 백악관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즌은 오히려 백악관보다는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상대인 공화당,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주당) 행정부의 시각에서 본’ 공화당에 중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전 시즌에 걸쳐서 백악관은 의회를 상대로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하며 로비를 벌이며 정책을 견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내부의 결집을 꾀하고 표 이탈을 막으려는 모습이 주를 이루었고, 공화당과 관련해서도 공화당 전체보다는 개개의 온건한 경향의 공화당 의원들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공화당의 지도부가 백악관의 협력대상으로 전면에 부상한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 화에서 대통령의 딸이 약에 취한 채 근본주의 이슬람 과격 단체를 자처하는 집단에 의해 납치를 당했고, 부정(父情)에 이끌려 잘못된 상황대처를 할까 우려한 대통령은 권한을 수정헌법 25조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에게 일시 위임한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부통령은 납치 직전에 성추문이 발생하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기 때문에, 헌법상 그 다음 계승자인 공화당 소속의 하원 의장 워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그래서 대통령의 보좌관들은 대통령의 딸의 무사를 염려하는 것과 동시에 공화당이 일시적으로 행정부를 장악한 틈을 타서 공화당이 원하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을 아닐지, 나아가 자신들의 정책들을 모두 뒤집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위기 앞에서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강경하게 사태에 대응하고 수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아랍 국가에 있는 해당 테러 단체의 근거지를 폭격하여 테러 단체를 압박하고, 일말의 타협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편 워킨은 보좌진들의 우려와는 달리 부통령 인선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고, 종전의 정책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았다. 잠깐이긴 해도 일시 권력을 잃어 전전긍긍했던 백악관의 참모진들은 오히려 소심하고 속 좁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화당의 처신은 대범했다.

 이후에도 공화당은 당면한 주요 현안에 대해서 국정운영의 협력자로서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는 연방 대법원과 사회 연금 개혁안이다. 연방 대법원장의 노쇠와 다른 대법관의 사망으로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자 공화당은 두 자리를 모두 보수 성향, 혹은 적어도 중도 성향의 판사를 지명하도록 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었지만, 강경 보수 성향의 판사를 대법관을 앉히는 대신에 대법원장 자리를 진보 성향의 여성 판사에게 양보함으로써, 연방 대법원 내 좌우의 균형을 맞춤과 동시에 ‘첫 여성 연방 대법원장’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사회 연금 개혁은 앞으로 닥칠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얼마나 큰 파국을 초래할 것인지 양당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당의 성향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익단체들의 주장이 첨예하고 대립하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먼저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비록 백악관이 비밀리에 물꼬를 터서 이 사안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문제를 다룰 의사가 있고 양보할 여지도 있음은 공화당측이 먼저 보였기에 가능했었다. 오히려 백악관이 예전부터 이러한 공화당 의원들을 ‘때리기’에 몰두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양당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한다.

 물론 공화당이 항상 이처럼 대범한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공화당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워킨에 이어 하원의장이 된 해플리는 보다 보수 강경파에 속하는 인물로, 행정부를 견제하고자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부통령으로 관철시켰고, 여기에 힘을 얻어 한걸음 더 나아가 감세를 적극 주장하였지만, 결국 지나치다고 생각한 대통령이 타협을 거부, 연방 정부의 폐쇄에 한 몫을 하였다. 공화당은 연방 정부 폐쇄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물었고, 실제로 얼마동안은 그 주장이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너무 욕심을 낸 나머지 동정여론과 정당성을 확보한 대통령이 주도권을 되찾음으로써 ‘독박’을 쓰기도 한다.

 이처럼 ‘쿨’하지 않은 면모를 보이기도 종종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웨스트 윙》의 다섯 번째 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당리당략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민주당의 믿을 수 있는 이상적인 파트너로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모습은 공화당 소속의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양당 출신의 전직 대통령들이 마침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에 대하여 다소 방법은 엇갈리긴 했지만 현직 대통령에게 근본적으로, 종전의 경제/전략적인 관계를 넘어설 때가 됐다고 조언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링컨이 이 에피소드에서 계속 언급된다는 점이다. 사망한 대통령이 링컨을 가장 존경했고, 고인이 대통령에게 남긴 유언에서 중동 문제에 대해 조언하면서 링컨을 언급했다는 점, 그리고 링컨 재임기의 내전이 에피소드의 부수적인 이야기로 언급된다. 내전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 자유와 민주주의와 같이 전형적인 미국적 가치로 인식되는 것들이 링컨과 공화당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망한 전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원은 그 사실을 아직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그에 대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유일하게 했었고, 그래서 자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더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고 회고하는 모습에서, 이상적인 공화당의 모습을 재차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 행정부를 주인공으로 다루면서, 이 드라마는 반동역할을 하는 공화당을 이렇게 묘사하였을까? 이상적인 대통령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 바틀렛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트지만, 그렇다고 독선적이지도 않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구식 유머를 즐기는 인간미 넘치는 세 딸의 아버지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철인(哲人)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설정되었다.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상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한층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도 같은 수준을 유지해야 그 긴장감을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의 절정은 이후의 두 시즌에서 등장하는 공화당 소속 대선 후보 아놀드 비닉을 통해 나타난다. 5시즌에서 나타난 공화당의 “대인”과 같은 모습은 비닉의 등장을 위한 초석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드라마 안의 가상의 정치판과 현실의 정치판의 상호 작용에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겠다. 현실의 정치가 드라마만큼이나 신사적이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정치가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들이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모습은 거꾸로 현실 정치가들에게 하나의 룰 모델로 제시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이상적인 정치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줄 것을, 또 정치가들에게는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바틀렛 대통령의 집권 5-6년차는 이렇게 지나갔다. 이 기간은 행정부가 당차게 뜻을 펼칠 수 있었던 기간이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들로 그 시기를 놓쳤고,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것을 겪어나가면서 바틀렛은 대통령으로서 더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성장은 절친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멘토 역할까지도 하였던 비서실장인 리오 맥게리와 점차 미묘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 성장은 ‘공화당’ 못지않게 이 시즌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미 그의 임기는 2/3선을 넘어섰고, 그는 이제 연착륙을 준비해야만 하는 시점에 들어섰다.

 

posted by Gruentaler